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상태바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 운영자
  • 승인 2008.11.05 13: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석찬목사<초동교회>


요즘 교계신문을 펼치면, 고개를 들 수 없다. 과연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을 흐리게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교단의 회장 자리가 무엇인지 온통 흙탕물에 구정물 냄새가 풍기는 소식이다.

교단들이 안에서부터 병들어 곪아 터져 고름이 흘러나오는데도 정작 근원을 찾아 뿌리를 고치려는 노력이나 의지 없이, 억지로 봉합하고 무마하려고만 한다. 비리의혹으로 해임되는 교단의 총무 소식이 실리는가 하면, 총회 이후 선거후유증인지 아니면 상습적인 통과의례인지, 세상 법정으로 확산되어 교회법에 따른 권징이 무력화되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교단의 정치원리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일이 힘의 논리로 전개되는가 하면, 이런 과정에서 지켜져야 할 성도들의 인권이 유린되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관심이 없다.

지금 교계는 인권(人權), 신권(信權)이 보호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되었다. 이 모든 악취를 풍기는 사건들 한 가운데에 ‘성직자’(聖職者)들이 있다. 필자도 성직자의 한 사람으로 불려지기에 정말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

성직(聖職)이 무엇인가?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세상과 구별됨 없는 성직은 있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자연인이며 신앙인이 어떻게 성직자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성도들로부터 존경받고, 성직자 앞에 머리 숙여 말씀에 경청하게끔 하는가? 성직자로서의 덕목들이 그가 자연인임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로 인정하고 존경하게 한다.

성직자의 덕목(德目)이 무엇인가? 겸손, 정직, 바름, 청빈, 희생, 말씀의 실천(化肉) 등이다. 사도 바울이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고전9:27)라는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 Imitation of Christ)에 있다. 이것은 성직자의 날개이다. 하늘(하나님)을 향하여 높이 날아올라 성도들로 우러르게 하는 날개이다.

그런데 지금 교계에 벌어지고 있는 온갖 추한 소식들은 도저히 성직자가 행하는 일이라 할 수 없다. 한마디로 평하면 후안무치(厚顔無恥)이다. 세상의 일과 똑같은 일을 행하여도 성직의 옷을 입고 행하면 더 엄한 기준으로 비판받게 되는 것이 성직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더럽고 추한 일들을 벌이면서도 성직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성직을 포기하였다는 선언부터 하여야 한다.

어떻게 주님의 날에 얼굴을 들려고 하는가!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사에 유래가 없는 성장을 이루게 한 뿌리에는 가난하고 힘들던 시대에 성직자의 덕목으로 산 분들의 드러나지 않는 희생이 있었다. 아침이슬을 먹으며 사는 것과 같은 청빈이 있었고, 한 생명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고 기도하는 깊은 영성이 있었다.

순교의 믿음이 있어서 절개를 지키며, 궁핍하다고 성직자로서의 자존심과 권위를 버리지 않았다. 이 분들의 작은 날갯짓이 한국교회를 비상하게 했다. 그런데 어느새 한국교회의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비만과 교만과 독선과 교권에 대한 욕심의 덫에 걸려 탐욕의 죄에 빠졌다. 이것들은 날개를 갉아먹는 죄이다.

한국교회는 추락하고 있다. 날개가 없기 때문이다. 큰 문제는 추락하고 있는 자신의 몸을 비행(飛行)하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회개해야 한다.

회개만이 없어진 날개를 다시 만드는 유일한 처방이다. 회개하며 성직의 덕목을 회복하기 위하여 물러나 부끄러워해야 한다. 바울의 고백대로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살도록”(갈2:20)해야 한다.

존경하는 성직자들이여. 정신 차리시오. 주님의 영광을 유감(有感)이라는 뜻은 ‘느낀바가 있다’ 또는 ‘소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감을 나누기를 원한다. 눈앞에 추수감사절이 다가왔다. 물론 교회에 따라 감사주일이 통일되지 않았으나 보편적으로 교회력에 따라 11월 셋째 주일로 지키고 있다. 성경에는 1년에 세 번의 감사제를 드리라고 율법으로 명령하였으니 유월절ㆍ맥추절ㆍ수장절등 세 번에 걸치는 감사제다.

성경에는 이런 감사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율법으로 명시하였다. 예수님은 감사의 여부를 확인하셨다.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신 주님은 감사를 찾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내가 10명을 고쳐주었는데 왜 혼자만 오고 9명은 어디를 갔는가”를 물어봤으니 금년도 추수감사주일에도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감사무감(感謝無感)의 9명을 찾으실 줄 믿는다.

다음은 성경의 감사제를 지키는 방법으로 먼저 감사제는 사람들 자신들의 즐거움이 아니다. 요즘 유행되는 할로윈이라는 서양의 귀신놀이가 10월의 감사축제의 자리를 빼앗아 젊은 청소년들의 잘못된 문화가 교회 안까지 들어오고 있음을 통감한다. 그리고 감사의 방법에서 복을 받은 대로 계수하여 드리며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어떤 물질감사만은 아니다. 감사의 중심을 가지고 의미있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레위인, 고아, 광부, 나그네와 함께 드리라는 것인데 이는 소외된 계층을 뺀 감사제는 무의미함을 말씀하고 있다. 결손가정, 무의탁 가정, 노숙자, 질병자, 많은 상처 받은 자, 금융위기를 맞아 도산한 사업자, 직장에서 쫓겨난 실직자들, 사회 각계각층의 상처받은 약한자들을 모두 아울러야 한다.

다음은 택하신 곳 중앙 성소에서 드리라고 했으니 교회중심에서 하라는 뜻에서 다분한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교회가 감사의 센터가 되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위상을 높여서 교회의 권위신장을 하라는 것이다.

오늘과 같이 안티기독교가 기세를 올리는 때 교회는 사랑의 본산지, 나눔의 실천을 하는 곳으로 이미지를 바꿔 교회의 본질회복을 하라는 뜻이다. 또한 이 감사 중에 중요한 감사는 앞으로도 지속하여 축복을 주시리라는 소망의 감사다. 이것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감사다. 결국 추수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처지에 있든 자원과 자족으로 감사가 넘치는 감사가 돼야 한다.

구속에 대한 감사의 보답은 영적 경건의 삶의 예배다. 구령의 증인의 사역으로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나눔의 감사유감(感謝有感)이 되기를 바란다.가리지 마시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