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1)전쟁과 전쟁의 소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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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1)전쟁과 전쟁의 소문들
  • 윤영호
  • 승인 2006.05.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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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무기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기독교신앙은 변질될 위기라는 지적이다.

 

[글 싣는 순서]


- 새 국면 맞은 전쟁

- 과연 성전(聖戰)은 있나

- 평화 가면 쓴 전쟁의 기만

- 위세 떨치는 ‘정당 전쟁론’


힘을 숭배하는 헛된 믿음이 창궐한 시대  

지난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꼭 60주년이 되는 해로, 이를 기념하는 갖가지 행사들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됐다. 2차대전은 제국주의의 패권이 재조정된 과정으로, 종전이후 세계는 냉전상황을 맞았다. 한국전쟁은 냉전을 드러낸 사례였다. 전세계 패권주의의 한켠에서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느라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전쟁의 고통 한 복판에 서 있다. 인류애를 부르짖는 휴머니즘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화되고 있으나 전쟁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다는 지적이다. 땅 끝 복음을 목표로 왕성하게 사역하는 교회는 증가하는데 전쟁은 왜 그칠 줄 모르는 것일까.


21세기는 전쟁의 공포가 사라진 장밋빛 시대일 줄 알았다. 강대국에 의한 군비증강과 첨단무기경쟁이 사라진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온 지구에 충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죄성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기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장밋빛 불태운 인간의 죄성

21세기를 예측했던 20세기 인류들은 냉전종식을 확인한 후 새로운 시대를 대망했다. 소비에트연방 코르바초프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은 바웬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폴란드의 자유노조에 힘을 실어 ‘자유선거’를 이끌어 냈으며,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는 동독인의 자유왕래를 허용해 결국 통독으로 결실을 맺는데 일조했다. 과거 동유럽 위성국가들의 정책에 간섭했던 소비에트연방은 이제 압력행사를 거부, 동유럽 국가들의 잇단 독립을 허용했다.


이런 변화 가운데 1989년 11월9일 철의 장막으로 불리운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으며, 이로부터 91년까지 소비에트연방에 소속된 국가들이 독립을 거듭, 불과 1년 안에 미국과 양축을 이루던 소련은 붕괴됐다.

91년 어간에 이루어진 소련의 붕괴는 반세기 이상을 끌어온 냉전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모두가 축포를 쏘며 10년 후의 세계를 평화의 시대라고 노래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을 평화의 시대로 말하는 사람은 매우 드믈다. 왜 이렇게 됐을까. 학자들은 냉전체제 때 생산된 각종 무기들에 대한 통제권에 주목하며 ‘위험한 시대의 도래’를 예견했다. 

냉전의 종말은, 이를 빌미로 얼마나 많은 무기들을 생산해왔는지를 보여준다. 한 추산에 따르면, 두 초강대국이 소유한 핵탄두가 어림잡아 5만개는 될 것으로 본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100만배나 더 큰 파괴력을 지닌 숫자이다. 세 차례에 걸친 솔트회담을 통해 전략무기들의 회수와 폐기가 합의됐지만, 이는 단지 회담에 합의한 것일 뿐 핵무기에 대한 공포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현재 파악된 핵무기 소유 및 발사시스템을 갖춘 국가는,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기에 이스라엘도 거명되는 나라들 중 하나이다. 지금 21세기는 두 국가만 통제하면 됐던 과거의 안보상황과 달리, 이제 두 국가가 사라진 상황에서 모든 국가들이 자국의 안보를 걱정하고 방위정책을 정비해야하는 ‘다국방위시대’를 맞은 것이다. 이는 자국의 안보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군비증강의 시대 도래’를 의미한다.


핵이 평화를 보장한다는 신화

지난 1979년 미국 국회문서인 ‘핵전쟁의 결과들’은 핵의 무서움을 이렇게 분석했다.


“단 하나의 메가톤급 무기가 디트로이트나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대도시를 공습하게 되면 200만명이 죽을 수 있고 100만명이 부상을 당할 수 있다. 소련과 미국이 보복을 한다면, 미국인구의 77%, 러시아 인구의 40%까지 죽을 수 있다. 핵폭발 30일 이내에는 방사능 때문에 더 죽고, 이후에는 전염병 때문에 그리고 수도와 전기가 끊겨서 죽고, 나중에는 유독 연기장막이 태양을 가려서 빙하기 상태의 지구환경 때문에 더 죽고, 정기적으로는 유전학적결과와 생태학적인 결과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막대한 재앙이 진행될 것이다.”

핵안보를 주장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이렇게 가공할 만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어야 전쟁을 방지한다고 근거를 제시한다. 이 주장은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듣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할 점은 개혁주의 신앙전통이 꾸준히 제기해온 ‘죄성’이 얼마나 인류를 고통 속에 몰아넣었는지 하는 부분이다. 죄성은 핵무기를 제조해서 인류파괴를 자처할 만큼 폭력적이다. 이는 더 큰 물리적인 힘을 가진 자만이 평화를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과연 그런가.

쉽게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요인들을 열거해 보자. 양보, 배려, 겸손, 정직, 고매한 인격 등등 이런 단어들을 크게 비켜가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힘이 센 것들, 완력이나 강제, 권력 등은 어떤 성격의 것들인가 생각해 보면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조폭이 평화를 지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힘에 대한  헛된 신화가 21세기를 맞은 현재까지 유효하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성은 가공할만한 무기를 제조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제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통제능력 잃은 죄인

냉전이 끝난 90년대 초 미국이 가장 주목했던 것은, 소련이 동유럽 국가에 배치해 놓은 핵무기의 완전 회수여부였다. 강력한 중앙 통제를 받던 핵 무기들이 중앙권력이 사라진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될지 몰랐기 때문인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양국은 전략무기 감축 협정인 ‘스타트’(START)협정을 서둘렀다. 러시아와 미국조차도 이 무기들이 어떻게 사용될지 확신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핵무기는 제조 외에 이를 제대로 다룰 통제능력이 전제돼야 평화 혹은 안보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태생적 죄성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 어떤 것들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힘에 의한 평화정책’은 아무리 뒤집어보고 또 봐도 힘을 소유한 자의 평화이지 인류의 평화는 아니라는 결론이다.

한반도를 정점으로 한 21세기 동북아시아는 현재 새로운 전쟁의 대립각 중앙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지적받고 있다. 냉전시대가 이념전쟁이었다면 현재는 시장확보 전쟁이랄까, 마치 산업혁명 전후로 나타난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지 개척에 비유될 만큼 지금 21세기는, 다국적 기업들의 신자유주의의 활로를 뚫어주기 위해 국가들의 무력담합과 핵우산 정책이 그들의 ‘죄성’을 무시하고 진행된다는 지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거룩한 전쟁(聖戰)에 대한 믿음은 점차 빛이 바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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