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필사는 내 병을 고치시는 도구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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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필사는 내 병을 고치시는 도구였지요”
  • 현승미
  • 승인 2006.03.2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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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10번 필사 결심한 홍성민부교

“살면서 크든 작든 한번쯤 아프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좀 남달랐지요. 육십 평생을 살면서 안 아픈 곳이 없었으니까요. 근데 알고 보니 그게 다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연단이었습니다.”


대대로 미신을 믿는 가정에서 자랐다는 홍성민 부교(구세군 돈암영문․박원국 사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연단은 결혼 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경찰공무원이었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결혼 초 가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이사를 해서 벽에다 못을 박기만 하면 눈에 탈이 나곤 했습니다.”


미신을 믿는 가정에서 오랫동안 보고 자라 온 그는 눈에 탈이 난 것조차 ‘삼순이 섰다’며 미신적인 방법으로 풀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영문도 모른 채 그는 먹구름으로 가득찬 삶을 살아야했다.


“그러던 중 남들처럼 생활하며 삼남매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막내를 낳은 후에는 자궁을 드러내는 큰 수술까지 받으며 미래에 대한 웬지 모를 불안감이 주변을 맴돌았지요. 그때 하나님이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막내아이가 백일이 됐을 때 한집에 살던 박명옥 부교의 전도로 지금도 출석하며 봉사부교로 섬기 고 있는 돈암영문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의 연단으로 다져진 그는 자연스럽게 교회에 다니게 됐고, 믿음생활도 굳건해졌다.


“신기하게도 교회에 다닌 후로는 아무 때나 어디에나 못을 박아도 눈에 아무런 이상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계신 하나님을 몰라보고 다른 우상을 섬기며 방황하는 제가 오죽 답답했으면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쓰셨을까 제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 감사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곧바로 가족전도로 이어졌다. 역시 예상대로 남편 서관중부교도 아무 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와 주었다. 다음은 삼남매가 주일학교에 나오게 됐고 즐겁고 행복한 믿음의 가정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품 안에서 내내 평화로운 것 같던 홍성민부교에게 또 한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어느 날 항아리를 들다가 허리를 삐끗 했는데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담임사관이 몇날며칠을 다니며 기도를 해줬다. 용하다는 병원이라는 병원은 모두 찾아다녔다. 내려진 진단은 하나같이 ‘디스크’로 판명됐다.


“디스크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다녔는데 별 차도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자꾸 디스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만 제 머릿속에 맴돌았지요.”



그렇게 허리가 아픈 채로 꼼짝없이 4년여를 보낸 그는 그해 겨울 새벽기도를 결심했다. 미끄러운 겨울 새벽길이 위험하다면 극구 만류하는 담임사관의 우려와 만류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병마와 싸우면서 몸도 마음도 지쳐갔습니다. 가족들에게도 못할 일이었지요. 마지막 희망이다 싶어 무조건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제가 믿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지요.”


▲ 5번째 성경필사를 하고있는 홍성민부교에게 20권이 넘는 필사노트는 그 무엇과도 바꿀수없는 소중한 재산이다.

여느 때처럼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부족한 아침잠을 자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짧은 꿈을 꾸게 됐다. 연년생의 삼남매를 둔 친구를 도와 아이들의 예방접종에 따라나선 그가 오히려 예방접종을 하게 됐고, 3개월 후면 날고 뛸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듣게 됐다. 현실처럼 선명한 꿈에서 깨어난 그는 곧바로 주변사람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마침 저희 영문에 새로운 사관님이 부임해 오셨는데, 이상하게 저한테 주방봉사를 시키시는 거예요. 전 아파서 못한다고 했더니 글쎄 다리로 못하면 입으로라도 봉사를 하라더군요. 그땐 그 사관님이 참 야속했지요.”


야속했지만 그 말을 거스를 순 없었다. 통증이 느껴지는 가운데에서도 주일이 되면 주방봉사에 나섰다. 그런데 정말 3주째가 되자 꿈처럼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직 감사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심방을 쫓아다니기 시작했지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분의 큰 뜻을 전하는데 불편한 다리쯤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4년이 지나서 제대로 된 병명을 알게 됐다. 척추에서 작은 뼈들이 나와서 신경을 건드려 서서히 마비증세가 오는 ‘척추골화증’. 일본에서 주로 많이 발병하고 우리나라에는 환자가 몇 명 안 되는 희귀병이었다. 당연히 국내에서는 수술 불가, 다행히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복용하며 호전증세를 보였다. 그러나 5년 후 약물치료도 한계에 달해 수술이 불가피해졌다. 오른쪽 팔다리에 마비증상이 온 것이다.


“일본에는 이 병만 전담하는 무료병원도 있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어렵사리 일본행을 결심했지요. 그런데 다행히 제 병명을 처음 발견한 김영조박사님이 일본에서 척추골화증 수술을 집도해본 경험이 있는 의사를 소개시켜주셨어요. 모두 하나님이 연결해 주신거죠.”  


그러나 홍 부교를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연단은 끝이 없었다. 수술날짜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목디스크까지 겹쳐온 것이다. 결국 시일을 두고 세 차례에 걸쳐 목과 허리수술을 받아야했다. 수술 후 전체적인 움직임은 많이 좋아졌지만, 이상하게 손에 힘이 없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면서도 매번 아기들이 하는 ‘쥐암쥐암’ 하는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때 큰 딸의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는데, TV를 보다가 부모의 공부습관이 아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경필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녀에게 공부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처음에는 연필 잡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때론 몇 줄에 그쳐야했고, 때론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라 생각되니 그만 둘 수 없었다.


96년 1월 창세기부터 시작된 성경필사가 드디어 98년 12월 끝을 맺었다. 2년만의 일이었다. 기쁨과 감사와 감동이 넘쳐났다.


“처음엔 정말 생수병조차 제대로 열수 없는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그런데 2년 동안 성경필사를 하면서 팔에 근력도 많이 생기고 가벼운 것들을 들 수 있게 됐어요. 하나님이 명령하신 성경필사가 내 병을 고치시는 도구였던거지요.”


큰 감동을 경험한 그는 본격적으로 성경필사를 결심했다. 두 번째 필사를 시작하면서는 더더욱 손에 힘이 생기고 허리와 목의 통증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첫 성경필사에 꼬박 2년이 걸렸던 그는 조금씩 시간을 단축해 4번째는 1년 2개월 만에 완성해냈다. 그만큼 병세도 호전됐고, 4번의 성경필사를 하는 동안 홍 부교의 신앙은 더욱 굳건해졌다.


“지금 구약 5번을 끝내고 신약 요한복음을 쓰는 중인데, 이번 필사가 끝나면 다음에는 영어성경 필사에 도전해 보려구요. 지금 제 나이가 62세인데, 대략 십년동안 5번의 필사를 한셈이니까 앞으로 십년을 보태서 죽을 때까지 10번의 필사를 끝낼 계획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그 이상도 도전해서 기네스북까지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그는 수술 후유증으로 고개를 좌우로 위아래로 돌릴 수 없고, 걷기에도 조금 불편한 다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심방을 다니고 차례가 되면 교회에서 주방봉사를 하고, 지금은 구역인도자로 구역성장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는 홍성민 부교. 그에게서 진정 우리를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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