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별건가, 다시 일할 수 있다는 게 바로 희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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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별건가, 다시 일할 수 있다는 게 바로 희망이야”
  • 공종은
  • 승인 2005.12.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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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르포] 태풍 나비로 아직도 `아픈 섬` 울릉도의 새해 맞이



포항에서 울렁거리는 뱃길로 3시간 여, 눈앞에 거대한 회색빛 바위섬이 떠오른다. 울릉도. 거대한 바윗덩어리다. ‘저 바윗덩어리 섬에 어떻게 사람들이 살까?’ 하는 의구심이 싹트기도 하지만 배가 울릉도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냄새가 물씬물씬 풍겨난다. 어쩌면 지난 여름 태풍 나비가 매섭게 휘몰아치고 간 아픈 기억 때문인지 부대끼는 사람들의 온기가 한층 더 진득하다.

“아저씨, 묵고 갈 방은 잡았습니꺼. 이리 오이소 싸게 디리께.” “오징어 좀 사 가이소. 한 축에 삼만언입니더. 이거 반만 말린거라서 이 엄는 할무이가 묵기에도 참 좋심니더. 마이 사모(많이 사면) 좀 더 디릴게. 기왕 이몬 여서 사소. 더 가몬 아무 것도 없심니더. 여가(여기가) 장 끝이라요.”

선착장에 내리자 육지 손님들을 반기는 움직임이 분주하다.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불러대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이게 울릉도의 생활이다. 한 사람이라도 놓칠세라 이리저리 불러대는 목소리가 왁자지껄하다. 배에서 내린 여행객들이 숙소를 잡고 들어가게 되면 거의 장사가 되지 않는다. 숙소로 향하기 전 그 30여 분 사이가 바로 이들의 하루 매상을 결정하는 중대한 시간이다.

부지깽이 같은 산채나물과 천궁, 더덕, 작약 같은 약초가 울릉도 주민들의 주 수입원이다. 그러나 울릉도 하면 뭐니뭐니 해도 오징어와 호박엿. 말랑말랑하고 적당하게 마른 오징어는 육지에서 맛보는 여느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오징어 파는 할머니가 바닷바람에 거칠게 갈라진 손으로 구워주시는 맛보기 오징어를 한입에 물고 씹는다. 달콤 짭조름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 말랑말랑한 것이 말려서 구운 오징어 같지가 않다. 

울릉도로 놀러가라고 말좀 해줘

할머니가 한마디 하신다. “육지 손님들이 좀 많이 와야 돼. 사람들이 나비 피해 때문에 미안해서 못 온다는데, 아냐 아냐.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더 와야 돼. 그래야 우리가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부서진 집도 고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젊은 양반. 집에 가면 주위 사람들한테 울릉도로 많이 놀러가라고 말 좀 해줘.”

이 말을 들으니 아차 싶다. 주민들에게 미안해서 여행을 포기한 사람들이 속출했는데 현지에서는 그게 아니란다. 육지 사람들이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란다. 육지 손님들이 많이 와줘야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하루라도 더 빨리 생긴단다.

“여기서 우리가 무슨 수로 돈을 벌겠어. 육지 손님들이 돈을 쓰고 가야 우리가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거야.” ‘힘내세요’라는 백 번의 말보다 한번 와서 밥 한 공기 먹어주고, 오징어 한 축 사주는 게 이들에게는 힘이요 희망이라는 말이다.

울릉도에선 오후 3시 정도면 시장이 파한다. 육지에서 배가 들어온 후 오후 3시에 다시 포항으로 떠나고 나면 더 이상 물건을 살 사람이 없다. 그래서 울릉도 도동항 시장은 오전 10시와 오후 2시, 하루 두 번 반짝 하고 생기가 돈다. 여행객들이 배에서 내린 이후와 배에 타기 전 한 시간 정도가 상인들이 장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러나 겨울로 접어들면서 뱃길도 하루에 한번으로 줄어 주민들의 시름도 깊어만 간다. 선착장에서 하얗게 말라가는 오징어도 이제 이들을 부르기에는 역부족이다. 할머니의 목소리도 점점 작아지고 바람이 한번 휭 불고 나면 육지 손님들도 끊기고 만다.

섬이라는 이유로 복구 늦어져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북적이는 도동항을 벗어나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의 모든 택시들이 4륜 구동 자동차들이라는 것. 급경사로 이루어진 울릉도에 눈이라도 내리면 거의 모든 차들이 운행을 멈추고 눈이 녹기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운행이 가능한 것이 4륜 자동차. 그래서 모든 택시들이 대형 택시들이다.




부두 앞에서 가파르게 시작되는 급경사는 4륜 자동차들도 시커먼 매연을 내뿜으면서 용을 써야 오를 수 있을 정도다. 그것도 이리저리 굽이굽이 돌아야 갈 수 있는 좁다란 길이다. 운전 솜씨들이 거의 기예에 가깝다.

힘에 겨워하는 자동차에 실려 30여 분을 달리자 섬 뒤편의 절경들이 펼쳐졌다. 또한번 탄성이 절로 나온다. 태풍 나비가 섬 뒤편을 정면으로 때리고 지나간 곳이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나지막하게 엎드린 집들의 폐허, 그 앞으로 뒤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잔해들이 여기가 바로 지난 여름 태풍 나비가 섬을 휩쓸고 간 자리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태풍이 지나간 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손도 대지 못하는 상황이다. 모든 물자가 외지에서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복구를 하고 싶어도 복구에 사용할 물자가 모자란다. 복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포크레인도 뒷산에서 밀고 내려온 돌덩이에 뒤집혀 아무렇게나 파묻혀 있다. 이미 망가져버린 기계를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고쳐서 사용해 보려고 그대로 놔둔 거란다.

집에는 사람들이 없다. 대신 거대한 나무 등걸이 벽을 뚫고 그 흉측스런 뿌리를 디밀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 방안에는 온갖 크기의 바위며 흙들이 천연덕스럽게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도저히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대로 놔두는 겁니다. 이 집만 치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요. 집 뒤로 있는 저 많은 바위하고 돌, 흙들은 또 언제 치웁니까.”

망연자실이다. 돈이 있어도 복구를 못한다. 울릉도가 섬이라는 것이 복구가 늦어지는 가장 큰 이유다. 4백50여 가구 정도가 피해를 입었다. 그렇지만 북구가 이루어졌거나 새로 집을 건축한 경우는 겨우 1/3 수준.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집을 수리라도 하고 새로 짓기도 했지만, 형편이 여의치 못한 집들은 아예 울릉도를 떠나버렸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울릉도를 태풍 한 번에 등진 것이다. 어찌 미련이 없겠는가. 그렇지만 무너지는 가슴을 달래며 육지에 있는 자식들을 찾아 떠났단다. 나머지 사람들은 인근의 친척집에 얹혀 살아간다. 생활이 말이 아닌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집이 부서진 것도 막막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답이 입은 피해도 막대하다. 산 속에 있는 서달마을의 경우 무너져 내린 토사와 바윗돌 때문에 전답의 80% 이상이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 철마다 해마다 맛있는 먹거리들을 내놓던 기름진 밭들이 하루아침에 돌밭으로 변해버렸다. 어디서 먹을 걸 구할건가. 아무 쓸모가 없어진 땅, 억장이 무너지다 못해 오히려 허허 너털웃음만 툭툭 튀어나온다.    

오징어에 온 삶을 건 사람들


살을 애는듯한 칼바람은 잦아들 줄 모르는데 어둠이 내린다. 수평선 끝에 걸친 오징어잡이 배들이 밝히는 집어등이 하나둘씩 켜진다. 오징어가 유일한 희망임을 말하려는 듯 집어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은 그 밝기를 점점 더해간다. 돌아오는 아침, 만선의 기쁨에 함박웃음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얼굴을 때리는 바람만큼이나 마음은 무거워만 진다.

“몇 년 전만 해도 한번 출어 하면 평균 5백에서 8백 상자 정도는 잡았는데, 지난해부터는 어획량이 급감했다. 이제는 채 1백50 상자가 안된다. 줄어도 너무 줄었다.”

동네 사람들이 전하는 오징어 소식이다. 요즘 들어 오징어가 영 안 잡힌다. 나가는 배마다 가득가득 오징어가 담겼으면 좋겠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된단다.

“그래도 손을 놓으면 되겠나. 안잡히도 날마다 나가서 잡아야 아들 핵교도 보내고 장개도 보내제. 안그렇소, 기자 양반?”

오징어잡이 배에서 켜지는 불빛만큼이나 빠르게 작은 등대들도 밝은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동해의 시작과 끝, 동해의 밤과 새벽을 지켜온 따뜻한 눈과, 그 눈만큼이나 크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등대들이 끝 모를 바다를 향해 그 환한 불빛들을 연신 쏘아보낸다. 오징어에 온 삶을 걸어온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듯 수평선 너머로 향하는 그 따뜻한 불빛은 밤이 새도록 끊일 줄 모른다.

아침, 수평선 너머로 붉은 기운이 서서히 번지더니 순식간에 하늘 색깔이 변한다. 하늘을 파란색만이 아닌 이렇게 선명한 붉은색으로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동해의 끝자락에서 확인한다. 수평선 위로 짙게 낀 안개 때문인지 그 붉은 기운을 뚝뚝 떨구며 떠올랐어야 할 해는 벌써 저만치 허공에 걸렸다.

가슴속 열기가 삶의 희망

아침은 이미 시작됐다. 그 할머니는 오늘 다시 이곳에 자리를 틀어잡았고, 도동항 앞마당에 모여든 오징어들은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짜릿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맛있게 말라간다. 움직임이 분주해 지고 말들이 빨라진다. 사람들이 늘어나고 바다에서 돌아오는 고깃배들의 고동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진다.

울릉도의 하루가 시작됐다.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희망이 솟구치듯 하얀 입김을 뚫고 활짝 웃는 얼굴이 비친다. 희망이 별건가. 이 생활이, 바로 이들이 울릉도의 희망이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뚫고 가슴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열기가 바로 삶이요 내일을 여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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