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하면 아이들의 신앙이 점점 떨어진다고 합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해도 그렇고,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해도 그렇습니다.
과거 주일학교 교역자와 교사들을 만나 고민을 들으면서 그 이유에 관한 생각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교사가 있다면 아마도 공감하는 고민일 겁니다. 이 글은 그 이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학년이 더해갈수록 신앙이 떨어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청년들과 나눈 대화에서 흔히 듣는 이유들이 있었는데요, 세상에 쏟아야 할 시간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너무 강압적이라고도 합니다. 비합리적인 이야기를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할 수 없다는 거죠. 교회 관계자들의 불의와 부도덕함을 이유로 들기도 합니다. 교회 가르침과 교회 현실이 너무 달라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먼저 변화에 대한 관찰입니다. 성경 이야기와 가르침을 무조건 믿고 받아들였던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혹은 학교 지식이 더해가면서 의심의 힘을 의지합니다. 그로 인해 아이들의 믿음은 미성숙한 것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학년이 더해갈수록 그에 따라 아이들이 신앙의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는 건 피할 수 없는 결론입니다. 중세의 신비가 데카르트의 합리적 의심을 만나 흔들리기 시작했고,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아이작 뉴턴의 수학적 논리와 실험에 근거한 논증의 힘에 의지한 자연과학의 세계가 열렸던 것과 같습니다. 논증이 없는 신비의 세계는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져, 그야말로 무너져 내렸죠.
이때 그나마 신앙을 지키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신론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신론은 합리적 신앙을 표방하면서 이성의 힘과 수학적이고도 경험적 논증을 존중하면서도 하나님 신앙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 여겨졌습니다. 대학생에게서 종종 듣는 회의와 논증에서 확인됩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경건주의가 등장해 일대 변화를 겪게 되죠. 신앙의 부흥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신앙에서 멀어졌다고 평가되는 신앙 현상에서 핵심은 믿는 태도에서 경험적 수학적 이성적 논증을 중시하는 태도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 그러니까 각종 논증을 중시하는 태도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기에는 유물론적인 영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유물론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것에서 받은 영향의 흔적이 현존한다는 겁니다. 곧 논증이 중시되는 사회는 경험적 확신에 가치를 두는 사회입니다. 물질의 세계에 속한 일인거죠.
영적 세계는 논증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경험하는 일이고, 열매로 나타나는 일입니다. 이에 비해 물질의 세계는 논증과 검증이 필요합니다. 성경 이야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신앙세계에서 성경 이야기는 경험되고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림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춤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놀이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가족과 사회에 대한 태도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서 어려서 가진 신앙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것이기보다는 논증의 세계의 대안이 될 만한 성경적 세계관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시작해서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쳐야 할 이유입니다.논증을 필요로 하는 세계가 아니라 열매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태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예배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만, 예배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많아 이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과거 내가 주일학교를 맡았을 때 아이들은 상급학교로 진학해도 숫자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수가 줄지 않으니 양적인 증가도 이어졌죠. 교사들을 통해 일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첫 번째 이유이겠지만, 다음의 이유를 말한다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근거하여 논증이 아닌 믿음의 세계를 가르치길 힘썼습니다. 예배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은 논증보다는 예배를 통해 경험되고 변화하고 열매로 나타나는 것에 가치를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