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의 기틀을 다진 대표적 종교개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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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기틀을 다진 대표적 종교개혁가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7.11.0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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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종교개혁 500년 ⑧ 장 칼뱅

“만약 내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제네바로 돌아오라는 당신의 요구만은 정말 거절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주님께 내 심장을 제물로 드립니다.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

장 칼뱅 (Jean Calvin, 1509 ~ 1564)

종교개혁이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됐다면, 장 칼뱅은 개신교 신학을 확립하고 안정시킨 대표적인 종교개혁가다. 칼뱅은 1509년 7월 10일, 종교적 분위기가 유난히 짙은 도시 프랑스 북부의 피카르디 지역의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났다. 그가 14세가 되던 때, 파리에 가서 신학을 공부했지만, 석사를 마치고 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오를레앙에 가서 법학을 공부했다. 칼뱅이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한 시기는 1533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회심 경험을 ‘기대하지 못한 사건’이라며, “주께서 갑작스레 나의 마음을 돌리셨다. 나는 곧바로 새로운 길을 달려가려는 열망에 불탔다”고 회상한다. 
1533년 칼뱅은 니콜라스 콥 총장의 취임 연설문을 함께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계기로 칼뱅에게는 수배령이 내려진다. 그 글은 전형적인 복음주의적 인문주의자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물 수 없게 된 그는 누아용, 앙굴렘, 푸아티에 등을 전전하는 도망자 신세가 됐다. 이후 칼뱅은 스위스 바젤에 머물면서 가톨릭주의자들에 의해 박해받는 고국의 개신교 신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1536년 한 소책자를 써서 출판했는데, 이것이 그의 대표작 ‘기독교강요’다. 칼뱅이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읽힌 폭넓은 문헌지식과 날카로운 해석 능력을 활용해 집필한 ‘기독교강요’는 개신교의 기본정신과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개신교 전체적인 신학적 핵심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당시 칼뱅의 나이는 27세였다. 이 책을 계기로 그는 루터에 버금가는 종교개혁의 중심인물로 떠올랐으며,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됐다. 

▲ 제네바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장 칼뱅의 초상화.

‘제네바’에서 종교개혁 주도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약하고 있던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을 만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1536년 8월, 잠시 묵어갈 생각으로 제네바에 도착한 칼뱅에게 파렐은 막무가내 식으로 “제네바를 위해 헌신해줄 것”을 요청했다. 칼뱅은 자신은 그냥 학자로 평생을 지내고 싶다고 말했지만 마침내 파렐의 권면으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돕게 됐다. 이렇게 제네바에 눌러앉게 된 칼뱅은 ‘성서 강해 교수’라는 직함을 얻고, 시민들의 생활을 보다 경건하게 만들기 위한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또한, 베른, 로잔 등 인근 칸톤(canton, 주)에도 종교개혁이 일어나게끔 힘썼다.

그러나 파렐과 칼뱅이 제시한 개혁안은 제네바 시의회의 눈 밖에 나게 되면서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1차 제네바 종교개혁에 실패한  칼뱅은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프랑스 난민을 위한 목회를 하며, 저술활동을 벌였으며 이곳에서 만난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뱅은 목회활동을 하며, ‘기독교강요’ 증보판을 내고, ‘로마서 주석’을 시작으로 신약성서의 주석본을 잇달아 펴내는 등 왕성한 집필활동을 벌였다.

1540년 이들레트 드 뷔르라는 이름의 홀부인과 결혼해 아이를 여럿 낳았으나 대부분 일찍 눈을 감았으며, 그의 아내도 결혼 9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1541년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원하는 정부가 선출되자 칼뱅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종교개혁을 지도하게 된다. 제네바에 돌아온 칼뱅은 프랑스에서 박해를 피해 도망 온 피난민들을 위해 목회했으며, 신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설교활동을 벌이며 유럽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개혁가가 됐다. 존 녹스(John Knox)를 비롯해 많은 영국인들이 칼뱅의 영향을 받고 청교도혁명을 일으켰다. 이밖에 네덜란드, 헝가리에도 칼뱅의 개혁신앙이 전파됐으며, 독일에까지 전해졌다.

‘종교개혁의 완성자’로 서다

시기적으로 칼뱅은 종교개혁 1세대인 루터나 쯔빙글리보다 한 세대 뒤에 활동을 시작한 2세대 종교개혁자다. 그렇기에 앞선 선배들의 약점을 보완하고, 넓은 안목으로 개혁교회의 신학을 종합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칼뱅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와 더불어 거룩한 생활을 통한 균형 잡힌 사상을 부각시켰다. 또한 루터를 비롯한 초기 종교개혁가들이 세운 원칙을 신학이론으로 체계화하고 확립했다. 당시 로마교회는 사람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회개, 고백, 선행 등의 행동과 교회(사제)의 사면, 징계 등의 조치가 개입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당시 개혁가들은 사람은 스스로의 선행으로도, 교회의 사면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으며 오직 신의 구원을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칼뱅은 이러한 개신교 원칙을 철학적으로 정립해 나가면서 ‘예정설’이라는 교리를 만들어 낸다. 인간의 구원 여부는 전적인 신의 섭리이자 의지로 미리 예정돼 있으며,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신교인들은 스스로 근면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는 것이 곧 신에게 선택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했다. 칼뱅이 엄격한 생활준칙을 강요한 것은 자신이 정말 ‘구원받게 될 사람’이라면, 구원이 정말 이뤄지도록 신의 말씀을 따라 살고, 신 앞에 겸허하게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칼뱅은 참된 교회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예배의 회복’을 강조했으며, 말씀선포, 구제, 성만찬, 기도(찬양)가 예배의 네 요소라고 보았다. 특히 신자들 모두가 함께 노래하는 회중찬양을 옹호했으며, 1539년 ‘제네바 시편찬송가’를 처음으로 출간했다. 1562년에는 시편 전체가 찬양으로 만들어졌다. 

루터가 개인의 구원에 관심을 둔 반면 칼뱅은 교회뿐 아니라 세상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며 사회와 정치의 구조를 개혁하고자 했다. 이러한 칼뱅의 사상은 교회를 넘어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서구 사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미쳤다. 특히 상업과 노동, 복지 등 경제영역 전반에 끼친 칼뱅의 영향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저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칼뱅은 경제 영역에서의 구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철저한 금욕주의를 강요한 중세 가톨릭과 달리 칼뱅은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상업과 사유재산을 인정했고 직업의 귀천을 넘어선 ‘소명’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해서 물질에 대한 탐욕까지 허용한 것은 아니다. 아울러 부의 불균등한 분배로 고생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컸으며 종합구빈원(General Hospital), 프랑스기금을 설립해 사회복지를 실천하며, 제네바를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도시로 만드는데 주력했다. 

제네바에서 벌어진 종교재판

칼뱅에게 반대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가 인문주의자였던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다. 그는 다재다능한 스페인의 신학자이자 의사로서 최초로 심장 혈액순환설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론과 성육신론을 부정하고 원죄설도 부정했으며, 예수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지상의 존재라고 보았다. 세르베투스는 가톨릭교회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돼 투옥됐으나, 탈출해 제네바로 도망쳐 왔다.

이후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오지 말라는 칼뱅의 경고를 무시하고 제네바로 돌아와 체포됐으며, 1533년 10월 화형을 당했다. 칼뱅은 세르베투스가 교리상의 이유로 죽어 마땅하다 믿었으며, 그를 고발함으로써 화형대로 등을 떠밀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사건은 칼뱅의 완고함과 냉혹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두고두고 거론된다. 그러나 칼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시 신, 구교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이 세르베투스를 단죄했으며, 칼뱅은 화형보다 덜 잔혹한 처형법을 청원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칼뱅 반대파의 마지막 공격 시도는 1555년 5월에 있었으나, 아미 페렝(Ami Perrin) 등은 실패하고 외국으로 달아났다. 같은 해에 칼뱅에게 제네바 시민권이 주어지면서 그의 권위는 부동의 것으로 되는 듯했으나 결핵이 발병하면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칼뱅은 병석에서도 집필을 계속하다가 ‘여호수아서 주석’을 완성한 뒤 자신의 신학을 계승한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의 품에서 1564년 5월 27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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