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즈산, 시내산 추정하기엔 고고학과 문자 번역의 한계 있어
시내산의 위치 여전한 숙제로 남아 … 충분한 조사와 토론 필요
시내산의 소재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 가지 관찰이 필요하다. 먼저 홍해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출애굽 루트를 가늠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이를 위해서는 ‘갈대바다’라는 뜻의 홍해가 수에즈만인지, 아카바만인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경로를 확인해야 한다. 또 ‘수르광야’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출애굽기 15:22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홍해를 건넌 후 수르광야로 갔다고 말하고 있는 만큼 수르광야의 위치가 결정되면 이스라엘 백성이 건넌 홍해의 위치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기 때문. 다음으로는 ‘가데스바네아’의 위치를 살피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열하룻 길’이라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가데스바네아가 사우디아라비아 동편에 있느냐 서편에 있느냐는 시내산의 위치를 판단하는 결정적 기준이 될 수 있다. <편집자 주>
#문자 번역의 오류 바로 잡아야
‘진짜’ 시내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는 김승학 권사의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한국이스라엘연구소(소장 신성윤 박사)가 ‘시내산은 어디인가’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지난 4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열었다.
정연호 박사(히브리대 구약학, University of Holy Land 교수)는 “김 권사는 ‘수르’가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수르’를 미디안 광야와 연결시키며, 그 근거를 민수기 25장 15절에서 찾는다. 그러나 출애굽기 15장 2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들어간 광야, ‘수르’는 민 25:15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일축했다. 즉, 전자의 히브리어는 ‘쭈르’인데 반해, 후자의 히브리어는 ‘슈르’라는 것.
그는 “히브리어로 전혀 다른 명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양자 모두 ‘수르’로 번역해 양자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짜 수르광야는 애굽의 동부 델타 지역, 즉 시내 반도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또 그는 아말렉인에 대해 “성경은 아말렉인이 네거브 광야와 수르광야에 걸쳐 활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며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당시 공격했던 곳이 미디안 광야가 아닌 시내광야”라고 주장했다.특히 ‘가데스바네아’는 시내산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기착한 지점 중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정 박사는 “라오즈산을 시내산으로 간주할 경우 신 1:2에 따라 열하루 길에 해당하는 페트라를 가네스바네아로 볼 수밖에 없고, 가네스바네아가 있는 ‘신 광야’ 역시 요단 동편에 설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나안과 유다의 남부 경계선에 근거해볼 때 가데스바네아는 결코 요단 동편에 위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성경의 증거는 수르광야, 가데스바네아 등은 요단과 아라바 서편에 위치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라오즈산 설’의 몇 가지 오류
몇 가지 고고학적 오류도 지적됐다. 임미영 박사(국제성서박물관)는 “김승학 집사의 아랍어에 대한 지식과 지명학적 자료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논쟁에 대한 풍성한 자료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모세와 관련된 전설적 이름이 연상되는 지역의 경우 지명학적 자료로 사용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특히 ‘제벨무사(모세의 산)’ 같이 모세와 관련된 전설적 이름이 연상되는 지역의 경우 지명학적 자료를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 현재 시나이반도의 시내산도 제벨무사로 불리며, 무슬림 국가인 모로코에도 제벨무사가 있지만, 이를 시내산이라 부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건넌 홍해가 시나이반도와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아카바만’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도 제기했다. “남녀노소 모두 합쳐 250만 명이나 되는 거대한 인구가 이집트 고센 땅에서 출발해 사흘 길을 걸어 도착하기엔 너무나 멀다”는 것. 또 이곳은 이집트 군대가 마차를 끌고 오기에도 여기까지의 여정은 너무 험난해 성서에서 말하는 ‘홍해’라고 보기 어렵다는 분석도 덧붙였다.
이밖에 김승학 권사가 증거로 제시한 타무딕 비문, 암각하 등의 고고학적 증거에 대한 이들의 입장은 어떨까.
강후구 교수(서울장신대)는 “미디안 땅의 바위에 새겨진 타무딕 비문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사용했던 글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후대의 비문”이라며, “이 비문의 증거를 두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임미영 박사도 “타무딕 비문은 고대 이스라엘과 주변지역의 문자보다는 기원전 8~7세기 발전한 북동 아랍어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미디안 광야에서 발견된 암각화에 대해서도 “미디안에서 발견된 암각화 그림 가운데 메노라 모티브가 나오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고고학적, 역사 문헌적 자료를 통틀어 메노라 모티브는 구약성서시대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고 일축했다. 따라서 바위에 새겨진 메노라 장식은 후대의 것으로 출애굽 당시의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남겨진 의문 지속돼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논란에 대해 김승학 권사는 반박을 제기했다.
먼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3일이 아닌 ‘7일’이라는 것이다. 김 권사는 “모세는 고센 땅에서 나와 숙곳에서 출발해 광야 끝인 에담까지 사흘길을 밤낮으로 걸어갔다. 그래서 아카바만 근처까지 주야를 걸어 에담광야 끝에서 일박을 했고, 그 후 가던 길을 돌려서(출14:2)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바다 앞까지 이르렀는데, 이 기간이 3일에 정도”라고 밝혔다.
가데스바네아에 대해서도 그는 출애굽기에 지명된 지명들의 정확한 위치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과 함께 김성 교수(협성대)의 ‘성서고고학 이야기’를 제시했다.
김 교수는 책에서 “가데스바네아는 시나이반도 북동지역의 베두인 중심지인 쿠레이마 남동쪽 4km 지점에 위치하는 고대 유적지(텔)다. 텔 상류 1km 지점에는 가데스바네아의 수원지인 쿠데이라트 샘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1950~1980년 조직적인 발굴 결과 이 요새는 이스라엘 왕국의 남쪽 경계를 수비하기 위해 BC 10세기에 솔로몬에 의해 건설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가데스바네아를 더 이상 성서적 출애굽과 연결시키지 못할 수 있다는 것.
김 권사는 바위에 새겨진 고대 암각화인 타무딕 비문에 대해서도 출애굽과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14, 15세기 이후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증거 자료로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립박물관의 타무딕 비문에 대한 자료 텍사스 주립대학교 마일러 존스 박사를 비롯한 각국의 고고학자들과 함께 고대 암각화를 해독한 결과를 제시했다.
아직까지 양측의 주장 모두 고고학적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감안할 때 시내산의 위치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다만 이번 논란에 김승학 권사가 불을 붙인 만큼 충분한 고고학적 조사와 활발한 토론만이 진정한 성지(聖地)를 발견케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