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가부장적 언어로 묶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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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가부장적 언어로 묶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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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5.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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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주기도문 번역안의 ‘아버지’ 호칭,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은선 교수<세종대. 종교․여성․교육>


이번에 KNCC와 한기총 두 기구가 그동안의 ‘주기도문 사도신경 연구특별위원회’ 탐구 결과를 바탕으로 ‘주기도문 새 번역안’을 내어놓은 것을 보니 정말 어이가 없다. 지금까지 써오던 주기도문을 번역상 오류를 고치고, 오늘날의 언어 사용에 더욱 합당하게 고치려고 내놓았다는 새 번역안은 그러나 이전 기도문에서도 없던 ‘아버지’ 칭호를 세 번이나 더 첨가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아버지’ 그림 안에 가두어 놓는 꼴이 되었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세계 신학계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에 ‘하나님 아버지를 넘어서’를 제시했고, 과거 성서의 여성 억압적인 언술들을 근거로 오늘날 2000여 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그렇게 하는 행위를 하나님과 역사에 대한 모독으로 밝혀놓았다. 그러한 행위는 성령의 계속적인 활동을 무시하는 비 신앙적 태도로 그동안의 모든 역사적 진화와 전개를 무(無)로 돌려버리는 일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러한 하나님과 역사에 대한 모독이 다시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일을 더욱 고착화시켜 여성들을 소외시키고, 아버지와 자식 간 이외의 모든 인간관계를 이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예전에 바울이 ‘종’들로 하여금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친 구절이 성서에 들어있다고 해서 오늘날도 여전히 ‘노예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지만, 유독 (여)성에 관한 억압과 왜곡만큼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 웬 만큼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 인간이 쓰는 모든 종교언어는 ‘상징’과 ‘비유’의 언어인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쓰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용어뿐 아니라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호칭까지도 일종의 비유이고 상징인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가부장주의 제도 아래서 살아왔다. 그 가부장 사회에서는 최고의 존재가 아버지였으므로 궁극자인 하나님을 표현할 때 아버지 칭호를 사용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부장주의 시대가 지나고 여성과 남성이 역할에서뿐 아니라 책임을 지는데 있어서도 보다 평등하고 좀더 통합되는 탈 가부장주의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도 궁극자에 대한 이름을 여전히 과거의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하는 것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며 스스로를 과거의 감옥에 가두는 일이다.

우리가 쓰는 종교 언어가 상징어이지만 어떤 상징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우리 사고의 폭이 정해지고, 우리들의 상상력이 정해진다. ‘아버지’로 한정된 하나님은 더 이상 궁극적이지도 못하고, 그 언어는 가깝게는 어머니와 여성들을 포괄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서 오늘날은 더 이상 인간만의 하나님이 아닌 전 자연과 우주의 하나님을 그려야하는 때인데, 그렇게 좁디좁은 인간적인 언어로는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자라나는 세대들은 아버지를 더 이상 예전의 전지전능한 가부장의 모습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세대들이 쓸 주기도문을 여전히 예전의 한정된 가부장적 언어로 묶어 놓는다면 그들은 결코 궁극자의 이상을 배울 수가 없고, 그들에게 그 궁극자인 하나님 에 대한 이야기는 일종의 신학적 농담이거나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

요즘 어느 한 신문에서 앞으로 한 나라의 경쟁력은 젊은 세대들의 상상력에 달려있음을 강조하는 글을 읽었다. 젊은 세대들이 그들의 상상력을 가지고 우리 세대 생각으로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그려내고, 그것을 실현해내려는 노력 속에서 앞으로 한 나라의 국가적 경제력도 좌우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세대가 그렇게 중시하는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지금처럼 한국 교회의 남성 리더들이 우리의 최고 상징 언어인 하나님 이야기를 그렇게 과거의 좁다란 언어로 한정시키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또한 과거부터 어떤 신앙의 교리나 신조를 합법화하려고 할 때 그것이 기존 교회 계층 구조의 권한과 특권을 강화하는 일과 관계된다고 의심 들 때는 결코 비판의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된다고 배웠다면, 오늘날 특히 여성기독인들은 이러한 우리의 뜻에 동참하는 동료 남성기독인들과 더불어 저항해야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하나님과 동시대의 사람뿐 아니라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도 죄를 짓는 이러한 기획을 하루 속히 단념하고 다시 진정으로 여성 기독인들과 함께 가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남성들의 행태에 지금처럼 ‘반박’함으로써 저항하는 길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교회를 모두 ‘떠남으로써’도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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