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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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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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5.2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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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교수<천안대학교> 


우리가 흔히 ‘한석봉’(韓石峰)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석봉은 그의 호이고 본이름은 ‘호’(濩)이다. 한석봉은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게 자랐는데, 홀어머니가 그의 뒷바라지를 위해 떡장사를 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소년 한석봉은 붓글씨를 공부하면서도 종이와 먹을 아껴 쓰기 위해 애썼다. 땅바닥이나 모래 위에 글씨를 쓰는 연습을 했던 것이다. 가난한 집안 살림을 꾸려 가는 어머니의 고생을 덜어 드리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한석봉을 불러 이렇게 타일렀다.

“어미를 생각하는 네 마음은 가상하다. 그러나 네가 할 일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네게 종이와 먹을 사다 주는 일은 이 어미의 즐거움이다. 너는 딴 생각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여라.”

한석봉은 이처럼 엄한 어머니의 격려 속에서 그 뜻을 받들어 더욱 열심히 서예에 정진했다. 엄격함 속에 감춰진 사랑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끝내 뛰어난 서예가로 우뚝 서게 됐다.

1567년 진사과(조선 시대 진사를 뽑는 과거)에 급제했고, 사어(司馭: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벼슬아치를 거쳐 가평군수를 지냈다. 그 뒤 지방 현령을 거쳐 서사관이 되어 나라의 주요 문서와 외교 문서를 도맡아 썼다.

그는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따라가 그 곳의 왕이나 벼슬아치들이 보는 앞에서 글씨를 쓰거나, 또는 외국에서 온 사신을 맞는 자리에서 글씨를 써 보여 이름을 떨쳤다. 나중에 그의 이름은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려져 중국의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모두 그의 글씨를 구해 가려고 애썼다고 한다.

한석봉의 친필 글씨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허엽신도비’, ‘서경덕신도비’, ‘선죽교비’ 등 그가 쓴 비문(碑文)은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그가 남긴 ‘석봉 천자문(石峰 千字文)’은 서예를 떠나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1583년 한석봉이 선조 임금의 명을 받들어 천자문을 써 올렸다.

선조는 이것을 목판본(木版本: 나무에 글을 새긴 뒤 그것으로 박은 책)으로 찍어 벼슬아치들에게 선물로 줬다. 이 목판본을 이용해서 다시 인쇄용 목판을 만들어 책으로 찍어 내, 얼마 뒤에는 모간(模刊: 본떠서 펴냄)된 ‘석봉 천자문’이 온 나라에 퍼지다시피 했다. 그래서 옛날 서당에서 어린이들이 처음 한자를 배울 때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한문 교실’에서 이 책으로 한자를 배우는 어린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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