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브 핫의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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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브 핫의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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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5.1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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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수의 구약읽기(29)
 

여인이 서원을 할 때 남편이 반대하면 그 서원을 지킬 수 없다(30:9-12). 이 규정은 일견 보기에 여성 차별적인 법령인 것 같다. 하지만 남편의 동의 없이 행해진 무분별한 서원으로 인해 공동체에 심각한 폐해가 있었다는 것이 짐작된다.

민수기에는 여성의 적극적 역할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민 27:1-11에 소개되는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땅 보존법과 관련된다. 레 25:23-28은 땅의 영원한 매매를 금지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어떤 이가 가난해서 남에게 땅을 팔고 난 후에 되찾을 능력이 없는 경우, 가까운 동족이 그 땅을 사서 가문의 재산을 보존해야 한다. 만일 그럴 형편도 되지 못하면 희년에 모든 것을 돌려 받게 되어 있다(레 25:28). 하지만 성서는 계승자가 없는 경우, 즉 아들이 없이 죽은 사람의 상속권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

가까운 근족이 땅을 사서 가문의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규정을 확대 해석한다면, 아들이 없이 죽어 간 사람의 땅도 마땅히 가까운 친족이 책임을 져야 할 것 같다(비교. 룻 4:1-12). 

그러나 슬로브핫의 집안은 예외였다. 아들 없이 죽어 간 아버지의 땅을 딸들이 보존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다섯 딸들이 회막(재판정) 문에서 모세를 비롯한 지도자와 온 백성 앞에서 아들이 없이 죽어 간 아버지의 땅을 자기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민 27:2-4). 모세가 그들의 하소연을 듣고 그 다섯 딸들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주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아들 없이 죽어 간 경우에 대한 법률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발생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구체적인 법조항이 마련된다.

즉 아들이 없이 죽으면 아비의 재산이 딸에게로 돌아가며(민 27:8), 딸도 없거든 아비의 형제에게 넘어가며(9절), 형제도 없거든 가까운 친족에게로 넘어간다(11절). 오늘날로 말하면 상속의 순위를 구체적으로 결정한 셈이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보여준 용기는 남성 중심적인 고대 이스라엘의 편파적 법률을 수정하게끔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섯 딸들의 하소연만으로는 가부장적 사회 체제가 하루아침에 변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는 딸들은 그에 상응하는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민 36:1-12에 계속된다. 만일 슬로브핫의 딸들이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가게 되면 아버지의 기업이 시집간 지파에 속하게 된다(민 36:3-4).

이런 문제가 대두되자 모세는 딸들의 결단을 촉구한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가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민 36:6). 모세의 명에 따라 그 딸들은 자기 지파의 사람에게로 시집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박종수교수/ 강남대학교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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