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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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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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0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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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교수<천안대>
 
 옛적부터 궁궐 뜰에는 돌로 된 소반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늘에서 돌로 만들어진 술잔 하나가 내려와 이 소반 위에 놓이게 되었다. 임금이 그 술잔을 집어 들려 했지만, 술잔은 소반에 딱 붙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임금은 대신들을 불렀으나, 아무도 소반에서 술잔을 떼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임금은 대신들에게 사흘간의 기간을 정해주고 이 기간 안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바로 이 무렵 한양에 머물고 있던 이름난 도사가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을 알려 주었다.

“술잔을 들어 올리는 일은, 항상 지아비를 지성으로 섬겨 온 여인만이 해 낼 수 있습니다.”


신하들은 이 말을 임금에게 고하자, 지아비를 지성으로 섬겨 온 여인들을 모두 불러오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 윤차남이란 사람이 이런 소문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 나라를 통틀어 봐도 정숙한 아내라면 내 아내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두 다 알지.’

임금이 정한 날짜가 다가와 한양의 모든 거리와 광장에는 혼인한 여인이란 여인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두 하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정절을 입증하고자 온 것이다. 그 가운데 윤씨의 아내도 끼어 있었다.

임금은 이 많은 여인들을 보고 나라 안에 덕행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며 무척 만족해했다. 그러나 막상 정해진 시각이 되자, 돌로 된 술잔이 놓여 있는 소반 쪽으로 선뜻 나서는 여인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는 저마다 자기 차례가 오면, 아주 상냥한 태도로 자기보다 나이 든 여인에게 차례를 양보하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되다 보니, 차례는 어느 결엔가 왕비에게까지 이르게 되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그런데 이 때 돌연, 나이가 지긋하게 든 소복 차림을 한 여인이 사람들 틈에서 나타났다.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와 돌로 된 소반 쪽으로 다가가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하늘로 높이 치켜들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시여, 당신은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의 증인이시옵니다. 열아홉 해 동안 저는 지아비를 잃고 홀로 지냈습니다. 저는 지아비가 살아 있을 때도 정숙한 아내였으며, 지금까지도 지아비에게 정절을 지키는 정숙한 아내이옵니다.”

이렇게 말한 후 그녀는 몸을 일으켜, 돌 소반 쪽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술잔을 잡았다. 술잔은 조금 흔들거렸지만 소반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자 나이 든 과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언젠가 아주 잘 생긴 남정네를 만난 적이 있사온데, 제 평생에 단 한 번 나쁜 마음을 품고서 그의 얼굴을 바라본 적이 있사옵니다.”

이렇게 말한 뒤 과부는 다시 소반 쪽으로 다가가 술잔을 쥐었다. 그러자 술잔은 소반에서 떨어져 들어 올려지는 것이었다. 과부에게는 아주 값진 선물이 내려졌다. 한편 모여 섰던 여인들은 이렇게 투덜거렸다.

“그런 나쁜 마음을 품은 적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줄은 미처 몰랐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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