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회로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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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회로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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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3.0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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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배목사<기장총회교육원장>

내게 치명적이지 않다면 동요하지 않는다. 웬만한 자극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아 잔혹한 이웃의 현실쯤은 겁날게 없다.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깊숙이 급소를 찔러대는 이웃의 참담한 현실을 보고서야 불에 덴 듯 화급히 놀라 자기방어에 나선다. 소통이 없는 단절의 시대로 치달아갈수록 자기 방어벽은 보다 견고해지고, 그런 만큼 이웃과의 단절은 깊고 견고해진다.

누가복음 15장에는 10드라크마를 전 재산으로 가지고 있는 여인의 얘기가 나온다. 10드라크마는 결혼반지에 해당한다. 남자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때 유대 사회에서는 사랑의 증표로 10드라크마를 줄에 꿰어주기도 했다. 그 중 1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은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절망한다. 밤이 되어도 등불을 켠 채 집 안팎을 샅샅이 뒤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마침내 잃었던 1드라크마를 찾아낸 여인은 이웃과 더불어 잔치를 벌이며 기쁨을 나누고자 한다.

오늘의 시대는 1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이 이웃과 더불어 잔치를 벌이는 과정을 용납할 수가 없다. 하물며 인류구원을 위해 죽어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랴! 인류는 커녕 민족의 개념마저 희석되고, 급기야는 이웃의 개념마저 모호해진 서글픈 시대 가운데서 다시금 3.1절을 맞는다. 칼을 찬 선생이 수업을 진행하고, 헌병 경찰과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도 신작로에서 따귀를 맞던 무단통치시대에 선조들은 이웃을 앞세웠고 민족을 앞세웠다.

회통이 없는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시대에 3.1 정신은 차라리 눈물겹다. 이웃의 소중함과 민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3.1 정신은 참으로 교파 간의 갈등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준엄한 선언에 가깝다. 웬만한 자극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다가도 자신의 이해에 얽힌 것이라면 그리도 절박하게 매달리고 마는 군상들에는 불행히도 그리스도인이 포함된다.

인류를 위해 나를 버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처럼, 민족을 위해 나를 버리고자 했던 무단통치하의 선조들처럼, 1드라크마를 되찾음으로써 사랑을 회복하는 기쁨을 맛보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고자 했던 가난한 여인처럼, 소박한 실재로부터 거대한 담론까지 오늘의 시대에 특히나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교회가 걸어온 길은 사실 솔직히 말해서, 현재로 다가올수록 포장된 길을 걸어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비포장의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내달린 일제의 폭압을 헤쳐 온 길과는 사뭇 다르다. 이웃의 아픔 때문에 밤새워 울며 기도했던 우리 신앙 선배들의 고달픔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마는 지금 우리 모습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내 한 몸 간수하기에만 급급할 뿐 남의 얘기에는 귀기울일 생각이 없어지는 것 같다.

내 한 몸의 상처는 노발대발하면서도 같은 크기로 흠집 난 이웃의 상처는 비웃기 일쑤다. 1드라크마를 찾은 여인네의 즐거움은 ‘가장 작은 것조차 온 동네와 더불어 감격’하는 애뜻함이 있다.

86년을 지나는 동안 3.1절은 우리나라에 많은 교훈을 주어왔다. 여기서 한 번 더 되짚어보는 것은 더 이상 이념 공방으로 스스로를 갈갈이 찢지 말자는 것이다.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의 강인함에 맞서는 대항 방법이 그보다 더 강한 무력으로서가 아니라 “대한독립 만세!”라는 작은 외침이란 점을 확인하며 이제부터라도 가장 큰 결과를 초래할 작은 소리에도, 힘 없는 외침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깨인 영성의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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