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연합예배, 분열과 통합의 역사 반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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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연합예배, 분열과 통합의 역사 반세기
  • 이현주
  • 승인 2005.02.1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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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첫 시작 후 보혁갈등 계속...대형집회 의미 90년대 들어 퇴색
부활절연합예배가 처음 시작된 것은 지난 1947년. 1만5천명의 기독교인들이 한과 수치의 장소였던 조선신궁터에 모여 해방에 대한 감사와 교회재건을 결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첫 번째 설교자는 한경직목사였으며 이후 부활절연합예배는 6.25 한국전쟁과 피난중에도 지역을 옮겨가며 계속되는 등 성도들의 신앙과 힘을 결집하고 혼란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뜻깊은 행사였다.

그러나 1962년 부활절연합예배는 한국 장로교의 분열과 맞물려 진보와 보수가 따로 개최하는 분열의 아픔을 겪기 시작했으며 이후 10년간 각각 다른 곳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1973년 진보와 보수의 화해움직임은 부활절연합예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분열의 역사를 청산했고 남산에서 8만여 성도가 운집한 가운데 성공적인 예배를 드렸다. 이후에도 분열과 통합을 계속하던 부활절연합예배는 70년대 대부흥기를 거쳐 80년대 이후 한국교회 대형화의 바람 속에서 대형집회의 의미를 상실, 인원동원 실패를 거듭하면서 무용론이 제기되어 왔다.

90년대 이후 부활절 연합예배는 교회협과 보수계열에서 대회장과 설교자를 번갈아 맡아 진행했으며 성도동원도 겨우 1~2만명 남짓한 인원을 참석시키는 등 대형집회의 이미를 상실해왔다. 2001년에는 몇몇 뜻있는 목회자들이 “한부연은 발전적 해체를 모색해야 한다. 대외적으로 상징성도 없고 대표성도 없는 행사”라고 비난했다.

당시 상임총무를 맡았던 박영률목사 역시 행사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가맹교단이 분담금조차 내지 않고 성도들의 참여도 독려하지 않는 상황에서 성공적인 행사를 이끌기는 역부족”이라고 고충을 토로했었다.

이러한 대내외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부연은 2003년 11월 실행위원회에서 한부연의 상설화로 재기를 모색했으며 대형교회 설교자 중심의 패턴을 유지하면서 재정과 인원동원문제를 해결코자 했다.

그러나 상설화 후인 2004년 첫 설교자로 나섰던  옥한흠목사가 한부연의 운영과정을 지켜보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급기야 행사를 한 달 남짓 남겨둔 상황에서 새틀짜기를 단행하는 등 투명하고 공신력있는 부활절 예배로의 회복 움직임이 일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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