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한국교회 과연 위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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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한국교회 과연 위기인가
  • 윤영호
  • 승인 2005.01.2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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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 한국교회 과연 위기인가

<하> 이중생활 하는 크리스찬



유리하면 교회법, 불리하면 사회법 고소불사 

기독교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시선은 사실 따지고 보면 교회보다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에 고정돼 있다. 만약 일반인들이 교회에 대해 호의적이지 못한 감정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교인들을 향한 것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들은 교인들이 말하고 활동하는 것들에 대해서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이곤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칭찬보다는 비난이 앞선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색한 반응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10년 넘게 식량난으로 고통을 당하는 북한주민들을 돕는 구호의 손길이 수년 째 계속되는 가운데 기독교계에서 전체 지원물량을 집계한 적이 있다. 그 결과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전체 구호물자 중 1/5이상이 기독교로부터 지원된 것들이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러 종교들이 참여하고 기업체가 지원하고 있는 국가적인 구호활동 속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무게가 이렇듯 무겁다는 사실을 증명한 결과였다.


기독교의 이같은 활동은 북한지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지역의 결손가정을 지원하는 일이나 도시락과 반찬 만들어 주는 일, 노인돕기, 장애인 돕기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봉사활동에서도 기독교의 무게는 엄청나다.


무슨 목적을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기독교는 똘똘 뭉쳐 목표한 액수 이상을 만들어냈고 그에 따르는 인력까지 동원하곤 했었다.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존재 그 이상의 책임을 다하는 셈이다. 그런데 뭐가 문제 길래 사회가 바라보는 교회에 대한 시각이 따뜻하지만은 않다. 무엇이 문제일까.



온전했던 초대기독교인의 삶

예수님 승천 이후 1세기가 지난 다음, 초대기독교인들의 독특한 습성을 직접 관찰한 한 사람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매우 흥미롭다.


“그리스도인들은 국적이나 언어나 준행하는 관습 때문에 남들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 따로 자기들만의 도시에 거주하는 것도 아니고 말하는 방식이 다른 것도 아니고 생활이 희한한 것도 아니다.…그들은 야만인 도시에 살면서 복장 음식 등 일상생활을 토착인의 관습에 따른다. 그러면서도 놀라운 생활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들은 시민으로서 모든 일에 동참하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일에 외국인처럼 참아낸다. 그들에게는 모든 외국도 자기 고국같고 고국도 이방과 같다. 법 규정을 지키지만 법을 능가하는 삶을 산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모든 사람을 부요케 한다. 모략 당하지만 의롭다함을 얻는다. 욕을 먹고도 축복한다.”


이 편지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특이한 점은 볼 수 없다. 인내하고 참고 사랑하는 예수님의 생전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주장했고 예배와 기도회에서 늘 들어왔던 얘기가 아닌가. 그런데도 이 편지에 주목하는 이유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교인들과는 너무나 다른 삶의 방식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편지가 쓰여 졌던 주후 1세기 상황이 지금의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문명수준은 달랐을지 모르지만 부귀와 명예 그리고 물질을 탐닉해왔던 인간들의 끊임없는 정열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 가운데서 당시 기독교인들의 삶은 이 편지가 기록한 것처럼 일반인들과 구별되고 있었다.



참지 않는 어글리 기독교인

“전철 문이 열리자마자 황급히 뛰어 들어온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동분서주 했죠.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권사님! 집사님! 하며 소리를 지르던 광경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아요.” 최근 들은 얘기의 한도막이다.

구태여 기독교윤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교인들의 이같은 행실은 추태로 각인될 것이다.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은 옛날보다 더 힘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많아졌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 책임의 양도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교회들은 성장이 기독교인의 책임을 강조한다는 가르침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가르친 것은 성장을 더 가속시켜야 할 선교적 과제 뿐, 사회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갈수록 교회 내부의 문제를 사회법정에 호소하는 경우가 늘어난다고 한다. 얼마나 많았는지 국내 최대교단인 합동총회는 ‘사회법정에 고소하는 자는 공직에 임명하지 말 것’을 총회에서 결의하기까지 했다. 앞으로 성직자 안수나 제직임명에 사회고소를 ‘무흠’규정에 포함시킬 날이 머지않았음을 보여준다.


지금 한국교회 기독교인은 결코 참지 않는다. 참으면 사악한 영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믿는가 보다. 교회재산을 놓고 목사/장로가 법정에서 다투는가 하면 목사/목사 고소도 증가, 멀쩡했던 교회를 두세 개로 쪼개는 참상을 연출하는 중이다. ‘법대로’를 주장했던 성직자들은 지금 교회노조라는 또 다른 ‘법대로’앞에 큰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기독교세계관과 제자도

고신대 유해무교수는 성숙이 모자란 현대 한국기독교인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을 교회의 울타리 밖에서 구현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사역이 지닌 넒은 전망을 교회에서 훈련받지 못한 탓이다.


많은 성도들은 사사건건 목회자의 지침을 기다리는 율법주의적 단계의 미성숙에 머물러 있다. 목회자의 영적 나태, 교회 안의 수많은 분쟁, 세상 속에서의 성도들 삶은 교회성장을 무력화시킬 뿐이다.”


수년 전부터 조심스럽게 나온 말은 ‘제자도’다. 제자가 가야할 길, 스승의 뒤를 그대로 따라야 할 길이 곧 제자도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적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함께 ‘기독교세계관’이란 말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과학적 합리주의, 진화론적 세계관 등 기독교 사상에 대항하는 수많은 관점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하나님의 구속사적 세계관을 정착시키려는 운동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지금 성장병에 시달리는 한국교회를 치료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진행되는 가운데 제자도와 기독교세계관 운동이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부패를 가중시키는 악질균이 ‘성장주의’라면, 제자도와 기독교세계관운동은 이를 퇴치하는 ‘백신’쯤 될 것이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승진을 위해, 명예욕 성취를 위해 목회자를 포함한 우리 기독교인은 제자도를 고의적으로 폐기시키는가하면 기독교세계관 대신 진화론적 세계관을 적용하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중적인 삶에 찌든 기독교인에 대한 체계적이 훈련과 교육이 절실한 때다. 교리중심의 신앙교육을 삶 중심의 교육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제자도요 기독교세계관 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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