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기독교 유적지의 역사와 의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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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기독교 유적지의 역사와 의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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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1.0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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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주교수/감신대 한국교회사

현재 노고단에는 허물어진 석조 예배당 유적 일부가 남아 있고 왕시루봉에는 수양관으로 사용되던 12채 건물이 남아 있다. 모두 일제시대와 해방 후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사역, 특히 내한 선교사들의 ‘여름 휴양’(summer retreat) 프로그램과 관련된 건물들이다. 그런데 노고단 유적은 물론이고 왕시루봉 유적도 훼손이 심해 붕괴될 위험이 크다. 남아 있는 유적들도 토지와 건물 소유권자인 서울대학교측의 철거 요구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선교사 수양관 설립 동기

1913년 5월 23일 스웨덴 출신 구세군 여사관 콜러(Magda Kohlor, 1886~1913)가 대구 동산병원에서 별세했다. 1911년 12월 내한해서 한국어를 익힌 후 호가드 사령관의 지시로 경북 의성에 파송되어 원당동에서 개척 선교사업을 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별세한 것이다. 콜러 사관의 죽음을 둘러싸고 선교사들 사이에는 ‘영웅적인 희생’이라는 평가와 ‘무모한 모험주의가 빚어낸 비극’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나왔고, 이를 계기로 위생 시설이 열악한 시골에서 선교사들의 활동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논쟁이 전개됐다.

한국교회사는 선교 초기부터 이런 ‘풍토병’, ‘전염병’ 등에 희생된 선교사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초기 의료 선교사로 활동했던 북장로회의 헤론(J. W. Heron, 1856-1890)은 내한 5년 만에 결핵으로 별세해 한국 땅에서 순직한 최초 선교사로서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첫 번째 주인공이 되었고, 게일과 재혼했던 그의 부인도 1908년 역시 결핵으로 별세했다. 미 감리회 의료 선교사 홀(W. J. Hall 1860~1894) 역시 1894년 평양 개척 선교사로 파송되어 청일전쟁 직후 전염병이 창궐한 평양에 들어가 환자를 돌보던 중 자신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별세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두 번째로 매장됐다.

캐나다 출신 독립 선교사 매켄지(W. J. McKenzie 1861~1895)는 동료 선교사들의 만류에도 “토착 선교를 하려면 토착민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서 황해도 소래로 내려가 토착민 마을에서 살다가 열병에 걸려 희생됐으며, 남장로회 선교사 코이트(Robert T. Coit) 가족은 순천 선교부 개척의 사명을 띠고 1913년 4월, 광주에서 순천으로 옮겼는데 매산동 선교사 사택이 완성되지 않아 임시 거처에 머물던 중 아내와 네 살, 두 살 박이 아이가 이질에 걸려 두 아들은 하루 사이로 죽고 부인도 사경을 헤메다 선교사들의 ‘중보기도’로 회생한 적이 있었다. 졸지에 두 아들을 잃은 코이트는 이를 두고 ‘불세례’(baptism of fire)라 칭할만큼 호된 시련이었다.

서울 양화진뿐 아니라 인천과 공주, 청주, 전주, 대구, 광주, 진주 등 과거 선교부가 있던 지역에 남아 있는 외국인 묘지를 둘러보면 작은 비석을 세운 어린 아이들의 무덤이 많은데 면역이 약한 서양 아이들이 풍토병에 희생된 결과였다.

이처럼 한말이나 일제시대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사역과 생명을 위협하는 최대 장애물은 수구 정치 세력이나 완고한 토착 종교가 아닌 위생과 질병이었다. 그 중에도 ‘풍토병’으로 불리는 열병과 설사병은 면역이 약한 선교사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질병은 선교사와 그 가족의 생명을 앗아갈 뿐 아니라 선교 사역의 장애 요인이 되었고 심지어 선교사직을 포기하고 귀국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에게 위생과 질병 문제는 개인이나 가족의 건강 문제로 끝나지 않고 소명과 사역의 근거인 선교의 장애 요인으로 인식되어 다른 무엇보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근본 문제로 부각되었다.

기후와 풍토, 문화와 환경이 다른 선교지역에 와서 활동하는 선교사로서는 휴식과 건강 회복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 필요했다. 선교부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선교사들은 ‘안식년’ 휴가 제도가 있어 5~7년마다 한번씩 귀국하여 1년 동안 휴양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기간에는 선교지를 떠날 수 없었다. 낯선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선교사들은 1차 안식년 휴가를 떠났다가 선교 현장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정치와 종교적 환경이 전혀 다른 선교지에서 격무에 시달린 선교사로서는 안식년 휴가 외에 ‘단기’ 휴식을 위한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더위 때문에 외부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한여름에 선교사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며 영성 훈련과 선교 정책과 방법에 대한 토론과 회의를 할 수 있는 ‘휴식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러한 휴식 공간은 가능한 한 선교사들의 ‘본국’ 문화와 환경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낯선’ 환경에서 긴장하며 사역에 종사하였던 선교사들에게 ‘고향’과 같은 환경과 공간이 있어 그 곳에서 육신과 정신적 휴식을 취하며 ‘재충전’(recreation)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목적에서 설립된 특별한 공간이 바로 ‘선교사 여름 수양관’(summer retreat center for missionary)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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