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다 되었소”, 우리말 성경의 뿌리가 되어준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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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다 되었소”, 우리말 성경의 뿌리가 되어준 선교사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3.27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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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⑦ 성경번역의 선구자,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1867~1951)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을 순회할 때 얻은 열매였다. 언더우드와 윤치호가 미국 교회에서 조선 선교를 도전할 때 헌신을 다짐했던 미국 남장로교 7인의 선교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 남부지역 중산층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대학 졸업 후 공립학교 교장을 지내던 중 목회 소명을 받아 유니온신학교에 진학했다.

1892년 11월 조선 땅을 밟았던 그는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호남지역 선교 사역에 매진했다. 무엇보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성경 번역에 두각을 나타났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 다수가 성경 번역에 열정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레이놀즈의 공헌은 혁혁했다. 신약성경뿐 아니라 구약성경 번역의 핵심 인재였다. 1910년 4월 2일 전주에서 사역하던 레이놀즈는 서울 선교사에게 “번역 다 되었소”라는 전보를 친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전주 이씨, 이눌서(李訥瑞)요”라며 자신을 소개하던 레이놀즈 선교사를 조명한다.

25살 청춘, 조선으로 부름받다
1867년 12월 11일 미국 남부 버지니아주 노포크시에서 태어난 레이놀즈. 그는 보수적이면서 경건한 신앙환경에서 성장하다 햄든시드니대학에 진학했다. 조선에서 성경 번역에 독보적 역량을 보여주었던 레이놀즈의 재능은 이때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3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면서도 그는 헬라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구사할 정도로 언어능력이 빼어났다. 대학 졸업 후에는 고전언어 분야를 비전 삼아 존스홉킨스대학 박사과정에 라틴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를 전공으로 입학하기도 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박사과정을 마치지 못했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공립학교 교장으로 2년간 활동했다. 당시 레이놀즈는 학교뿐 아니라 YMCA 정기집회에 지속적으로 참석하면서 목회자의 비전을 세우게 됐고, 1890년 유니온신학교에 입학했다. 

바로 그곳에서 조선 선교로의 대전환을 이뤄낸 역사적 만남이 이뤄졌다. 1891년 레이놀즈는 유니온신학교를 대표해 테네시주 네쉬빌에서 열린 ‘해외 선교를 위한 신학생 동맹’(The Inter-Seninary Alliance for Missions)에 참석해 언더우드 선교사와 조선인 윤치호의 강연을 듣게 된다. 강연은 레이놀즈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곳에는 훗날 조선으로 함께 떠나게 될 윌리엄 전킨, 루이스 테이트 등도 함께 있었다. 레이놀즈 등 젊은 학생들은 조선 선교사로 가기로 결단했다.

하지만 미 남장로교는 재정 부족을 이유로 공식 파송을 주저했다. 결국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이 2천 달러라는 거액을 헌금하면서 이른바 ‘남장로교 개척자 7인 선교사’는 조선으로 향할 수 있었다. 레이놀즈는 파송을 앞두고 볼링이라는 여성과 결혼했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다. 레이놀즈는 지난한 여정을 거쳐 1892년 11월 3일 제물포항에 도착해 곧장 한강을 따라 배를 타고 용산 나루에 당도했다. 25살 나이였다. 입국 일주일 뒤에는 미 남장로교 한국선교부도 조직되었고, 레이놀즈가 회장을 맡게 됐다.

복음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1893년 ‘장로교선교부공의회’ 결의에 따라 미 남장로교는 호남지방을 담당하게 됐다. 선교를 준비하는 시기 레이놀즈는 7인의 선교사 중에서도 조선말을 가장 빨리 배웠다. 여러 지역을 다니며 조선 사람과 대화를 시도했고, 언더우드와 직접 거리에 나가 전도하기도 했다. 입국 6개월 만에 조선말로 설교까지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처음 조선에서 여름 날씨는 힘겨웠다. 레이놀즈는 더위를 먹을 정도였다. 한 선교사의 주선으로 북한산의 사찰에서 쉬면서 겨우 몸을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큰 아픔을 겪고 말았다. 1893년 여름 첫아들이 그곳에서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난다. 미국 남장로교의 첫 희생자는 현재 양화진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이듬해 둘째 존 레이놀즈가 태어난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존 레이놀즈는 아버지 뒤를 이어 군산과 순천에서 사역했으며, 뉴욕시립대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1970년 미국에서 사망 후 유언에 따라 양화진 형의 곁에 묻히기도 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데이비스 선교사와 초기 서울에 머물면서 인성부재(서울 인현동) 채플을 인도하면서, 훗날 호남지역 선교를 위한 역량을 쌓았다. 거리전도와 축호전도를 이어가면서 출석 교인이 늘기 시작했고, 직접 세례를 베풀어준 교인들도 생겨났다. 

1897년 레이놀즈는 호남지역 최대 도시였던 전주에 정착해 본격적인 목회를 펼쳤다. 전주에서 목회로 교회마다 부흥한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1900년 8년 만에 안식년을 다녀온 레이놀즈는 목포를 거쳐 다시 6년간 서울에서 승동교회와 연동교회에서 목회했다. 성경 번역에서 두드러진 사역을 했던 그지만, 항상 복음을 전파하고 현장에서 목양하는 목회자였다.

그는 1908년 갑자기 전킨 선교사가 폐렴으로 사망하자 전주로 돌아와 교회를 돌봤다. 이때부터 1921년까지 전북지역을 순회하며 교회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21년부터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게 되면서 평양에 거주하게 됐는데, 그곳에서도 그는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오토바이를 타고 각처 교회들을 다니며 목회를 멈추지 않았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 파송을 받아 입국해 호남지역 선교와 우리말 성경번역을 위해 크게 헌신했다. 

일생을 성경번역에 공헌
레이놀즈 선교사의 가장 큰 공헌을 우리는 성경 번역에서 찾을 수 있다. 1895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마펫(Samuel Moffett)의 추천으로 성서번역 위원으로 위촉된 것. 아펜젤러 선교사는 입국 3년 차에 불과한 그의 임명을 처음엔 반대했지만, 평양신학교 설립자 사무엘 마펫은 강력 추천했다. 1892년 이제 막 입국해 말과 글을 익히던 레이놀즈를 데리고 남부지역 전도 여행을 갔다가 그의 능력을 눈여겨봤던 것. 더구나 레이놀즈는 선배 선교사의 번역 오류를 정확하게 짚어내면서 다른 번역위원들도 그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번역할 수 있도록 성경 분량까지 배분해 주었다. 

성경 번역은 단숨에 이뤄질 수 없는 대장정이었다. 레이놀즈는 언더우드, 게일과 함께 성경 번역에 매진했다.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총 555회 토론과 수정 과정을 거쳐 최초의 공인 ‘신약전서’가 출판됐다. 특히 레이놀즈는 1899년부터 1937년까지 구약성경 번역과 개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맞춤법 통일안 등에 따라 몇 차례 표기나 용어가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은 레이놀즈의 헌신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서울과 전주를 오가는 바쁜 사역 중에서 다른 선교사와 조선인 조사들과 함께 번역을 멈추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1907년부터 구약 번역에 매진한 끝에 레이놀즈는 1910년 4월 2일 오후 5시 모든 번역을 완료하고, 앞서 언급한 “번역 다 되었소”라는 전보를 쳤던 것이다. 구약전서는 1911년 3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3만부가 인쇄됐다. 신구약 성경전서가 공인역으로 출간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11년 성서위원회는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번역위원회를 개정위원회로 전환하고 레이놀즈에게 다시 위원을 맡기고자 했다. 지쳐있던 레이놀즈는 고사했지만, 개정 작업에서 그가 없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개정위원으로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개정 작업은 베어드 선교사와 피터스 선교사 중심으로 진행됐다. 최초 번역을 했던 레이놀즈가 있었기 때문에 개정 작업에 큰 도움이 됐다. 마침내 1937년 8월 구약전서 최종 개정본이 완성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이 당시 번역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레이놀즈는 1937년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손에 꼽을 정도였던 교회 수가 45년 만에 3,500개 이상이 됐다. 성경 번역에 열정을 쏟으며 그가 드렸던 기도와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은퇴 후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물다 1951년 4월 85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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