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진 치는 목회로, 온갖 유혹과 역경 이겨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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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진 치는 목회로, 온갖 유혹과 역경 이겨낼 수 있어”
  • 파주=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2.0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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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사명선언문] 양의문교회 정원달 목사(예수한몸 대표)

눈앞의 이익보다 목회 소명이 항상 우선
예수한몸 사역으로 건강한 교회 세우도록

“안정만을 찾아가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늘 생각했어요. 항상 배수진을 치고 목회를 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돈에 대한 유혹도 없었고 다른 미련도 없이 오로지 목회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일 감사한 일입니다.” 

양의문교회 정원달 목사는 우여곡절 많은 목회 여정을 달려왔다. 교회가 부흥하고 교회 건축까지 마치며 탄탄대로 달리는 듯싶다가도, 어느새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되기 일쑤였다. 낙담할 만한데 그는 한번도 목회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받은 사명 때문이다. 오로지 30년이 넘도록 목회를 걸었더니, 예수님으로 한 몸을 이루는 교회가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그간 쌓은 목회적 깨달음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나누며 ‘예수한몸’ 사역을 펼치고 있는 정원달 목사의 삶과 신앙 이야기를 들어봤다. 

양의문교회 정원달 목사는 부르신 사명을 따라 포기하지 않는 목회를 펼쳐왔다. 그간 목회 경험과 노하우를 ‘예수한몸운동’을 전개하면서 아낌없이 나누고 있다.
양의문교회 정원달 목사는 부르신 사명을 따라 포기하지 않는 목회를 펼쳐왔다. 그간 목회 경험과 노하우를 ‘예수한몸운동’을 전개하면서 아낌없이 나누고 있다.

영양실조에서 발견한 비전
경북 영덕에서 마을 어른을 따라 교회를 처음 다녔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어른은 6살 아이를 새벽마다 데리고 교회를 오갔다. 집안이 믿지 않았지만 허락했던 것도 신기한 일이다. 그렇다고 정원달 목사가 어린 시절 투철한 신앙을 갖고 있던 건 아니다. 그저 교회 절기면 교회에 가는 수준이었다. 

집안은 너무나도 가난했다. 3년 동안 장학금을 받기 위해 포항공고에 진학하게 됐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입주 가정교사로 살아내야 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부모를 향한 원망은 없었다. 자립심이 강했던지 늘 혼자 해내곤 했다. 대입시험을 위해 가정교사를 그만두고는 학교 계단 밑에서 스티로폼을 깔고 살기도 했다. 그러다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말았다.

“한 친구가 아침마다 죽을 쑤어주고, 교회에 데려가 주었어요. 교회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에 대해 확신이 생겼고, 목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시골에서 일해봐야 빚 밖에 안 남는다고 설득했습니다. 속뜻은 전도였던 거죠.”

큰아들 정원달에 대한 신뢰가 컸던 부모님은 다른 4명의 동생들과 포항으로 이주했다. 땅 팔고 집 팔아도 겨우 7명이 몸을 누일 정도의 방 하나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목사가 되겠다고 했지만 빨리 결혼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가난하고 식구들만 있는 데다 신학교를 가겠다는 청년에게 과연 누가 시집이나 올까? 다행스럽게 ‘가정선교사’로 가겠다는 준비된 신부가 있었다. 

그런데 정 목사는 신부만 남겨둔 채 결혼 후 6개월 만에 입대했다. 아내는 가구 하나 들이기 힘든 작은 방에 남겨졌다. 정 목사는 “목회하는 동안 아내의 몫이 51% 이상이라고 생각한다”며 고생한 아내 생각에 잠시 눈시울을 적셨다. 온갖 위기 속에서도 정 목사를 믿고 지지해준 주인공은 백석사모합창단 부단장 이온숙 사모이다. 가족 복음화도 결국은 성취됐다. 

가진 것 없어도 도우시는 하나님
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고 있던 때 출석 교회 담임목사님이 전라남도 광양군에 가서 개척해야 한다고 도전했다. 말씀에 순종해 5개월 후 용달 트럭 하나에 짐을 싣고 무작정 내렸다. 준비된 것은 3평 방 하나였다. 담임목사님이 주신 강대상이 교회 물품이었고, 비키니 옷장 하나가 살림이었다. 26살이었다.

“강대상에 딱 서면, 아내 머리꼭지만 보이는 겁니다. 그래도 얼마나 열성적으로 설교했는지, 옆방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예배를 드리러 온 겁니다. 지금은 그분들이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어요.”

50대 목회자가 수두룩한 고장에서 너무 어린 티가 날까, 머리에 포마드를 잔뜩 바르고 나이 들어 보이는 옷에 흰 고무신까지 신었다. 2년 반 목회하는 동안 장년 120명, 아동부 200명, 중고등부 50명으로 부흥했다. 하지만 교회가 교단 정치에 휘말리게 되면서 큰 어려움이 닥쳤다. 그는 내려놓기로 결단했다.

“나만 물러가면 교인들은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교단 본부에 후임자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바로 다음 날 내려오더라고요. 다시 용달차 하나만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개척 전 교회로 돌아와 15년 동안 부교역자로 다시 섬겼다. 40대 중반이 되자 사임 했고 다른 교회에서 사역하던 어느 날, 이번에는 담임목사 대신 교회를 맡아달라는 주축 교인들의 유혹이 들어왔다. 그는 바로 다음 날 사임해버렸다.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지만, 아닌 것은 아니었다. 

“일산신도시와 능곡 사이 벌판에 축사가 하나 있었어요. 그곳에서 양의문교회를 처음 개척했습니다. 몇 겹이나 쌓인 먼지를 보고 아내와 아이들이 슬퍼할까봐 혼자서 쓸고, 버려진 자재를 가져와 방도 만들었어요. 혼자 사다리를 타다 자빠질 때마다 혼자 실컷 웃었습니다.”

화장실도 없어 땅을 파고 거죽대기를 두른 벌판의 축사 교회에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10리고 20리고 나가서 전도한 열매였다. 아무리 열악해도 전도하면 열매가 있다는 생각도 이때 확고해졌다. 그런데 축사지만 월세를 내야 했고, 보증금까지 다 까먹자 주인은 나가라고 했다.

“교회 밖에서 트럭이 하나 섰는데 운전자가 담배를 피고 있어요. 며칠 따라다니며 일을 좀 배워도 되냐고 했더니 흔쾌히 동의해주는 겁니다. 인테리어 일이었죠. 벼룩시장에 광고를 냈더니 덜컥 일감이 들어왔습니다. 무작정 목재소 가서 물어물어 엉터리 견적을 처음 냈는데, 가장 비싼데도 제게 일감을 주는 겁니다.”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는지, 일감이 몰렸다. 일한 지 6개월 만에 53평 땅을 사고 3층 예배당을 지을 돈도 벌었다. 바울과 같이 텐트 메이킹을 하며 지금의 자비량 목회를 했던 셈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 목사가 직접 교회 건축도 마쳤다. 

“교회 전소? 그러나 다시 섭니다”
교인들도 또 늘어갔다. 2년쯤 지났을까? 200명 이상 교세가 되었을 즈음, 날벼락처럼 교회가 완전히 불에 탔다. 

“불났다는 소식에 교회에 도착했더니 우리 교인들이 모두 울고 있어요. 추운 겨울, 그날로 카펫 하나를 주워서 불탄 건물 안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앓고 있는 비염을 얻었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보내셨는지 기적처럼 뭉칫돈을 들고 온 다른 교회 성도가 계신가 하면, 우리 교인들은 제 뒤에 앉아 무릎 꿇고 자발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혼자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교회를 다시 짓자고 먼저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재개발 수용된 곳에서 일 년만 있자는 생각으로 임대했더니 개발이 늦어지면서 5년 동안 다시 일어설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지금 양의문교회 예배당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옮긴 곳은 사실 정 목사가 오가면서 2~3년을 지켜보던 교회 건축 현장이었다. 

“채권자가 아주 많은 건축물이었어요. 잠시 들러봤는데, 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어려움을 겪던 목사님이 계시더라고요. 먼저 인수해달라는 겁니다. 재정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믿음으로 나갈 때 사람을 붙여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터전을 다지고 지금은 내실을 더욱 다져가고 있습니다.”

2014년 백석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제는 백석총회 가족으로 ‘예수한몸운동본부’를 세워 목회자와 교회를 돕는 사역을 매진하고 있다. 무료로 목회자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 안에서 화합이 이뤄지고, 가정 복음화가 성취되며, 교회가 성숙해지는 전도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한몸’은 생명력 있는 교회를 세우자는 운동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으로 돌아가목회자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된다면, 사역 현장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건강한 목회자와 평신도를 키워내는 데 더욱 매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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