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과 부흥의 길] 탁월한 신학과 유명한 설교 많지만 ‘예수생명의 체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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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과 부흥의 길] 탁월한 신학과 유명한 설교 많지만 ‘예수생명의 체험’이 없다
  • 권성수 목사
  • 승인 2024.02.0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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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수 목사와 함께 찾는 ‘한국교회 회복과 부흥의 길’ (2) 예수생명, 내게 없다고?
권성수 목사/대구동신교회 원로목사
권성수 목사/대구동신교회 원로목사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생명이 약동하고 흘러가면 된다. 회복과 부흥의 길은 이렇게 간단하다. 그런데 이것이 안 되고 있다. ?

무덤덤한 것이 문제의 뿌리다. “당신의 신학에는 예수생명이 없다라고 하면 내게 예수생명이 없다고?”라고 반문한다. “당신의 설교에는 예수생명이 없다라고 하면 왜 없다는 거냐?”고 항변한다. 예수생명이 없다는 것에 무감각할 뿐 아니라 무관심한 것 같다.


강의와 설교로 명성을 떨치는 유명 교수의 40분짜리 설교를 두 번이나 들었다. 감정 위주의 주관주의가 아니라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진리(10:27)에 따라 주의 음성을 애타게 기다렸다. 시작부터 기대했으나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20, 30, 40분이 지나도 그것은 없었다. 지적으로 반짝거리기는 하지만 가슴에 다가오는 은혜가 없었다. 외양(外樣) ‘밀가루의 실상(實狀) ‘톱밥을 씹는 듯했다. 양식 같은데 양분이 없었다. 예수생명이 없었다. 성경적 신학적 설교학적 만점짜리 설교에 왜 예수생명이 없을까?

설교준비를 머리로만 하기 때문이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귀로만 전달하기 때문이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조화롭게 결합된 신학과 설교는 전인(全人)을 변화시킨다. 이지적인(cerebral) 지식전달만이 아니라 지정의(知情意) 전인으로 예수생명을 체험하고 전달할 때 예수생명의 상호작용이 있다. 예수생명이 제대로 전달될 때 소위 은혜 받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지정의(知情意) 전인(全人)신학이 아니라 머리(知性)로만 연구하고 가르치는 신학은 사변(思辨)신학이다. 머리로만 준비하고 입으로만 전달하는 설교는 사변(思辨)설교다. 사변신학과 사변설교는 아무리 개혁주의 정통이라 할지라도 죽어가는 정통’(dying orthodoxy)이다. 한국교회의 정체(停滯)와 쇠퇴의 근본 이유는 탁월한 신학과 유명한 설교는 많아도 예수생명의 체험과 전달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생명이 약동하고 흘러가려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관계(vital relationship)에 민감해야 한다. 성경진리에 충실한 정통(正統, orthodoxy)과 성경진리대로 살아가는 정행(正行, orthopraxy)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풋풋한 첫사랑의 생동(生動)이 있어야 한다.

정통과 정행의 소위 모범적인에베소 교회를 예수께서는 신랄하게 책망하셨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2:4).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첫사랑을 잃어도 얼마든지 잘 살고 있다고 반문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하셨다.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

촛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무한가치의 황금이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무한사명의 광채(光彩). 아무리 정통과 정행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으면 황금도 사라지고 광채도 사라진다. 가치를 잃고 사명을 놓치면, 교회는 세상에 욕먹고 짓밟힌다. 한국교회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수액(樹液)을 섭식(攝食)하고 생명수액을 분출(噴出)할 수 있다(15). 한국교회는 예수생명과 밀착접속이 없어 개혁적이라고 하나 썩어가는 정통의 중죄(重罪)를 범하고 멀쩡해 보이나 죽어가는 정통의 중병(重病)을 앓고 있다.

내게 예수생명이 없다고? 날 모독하고 망신 주는 거냐?” 항변하는 자존심을 내려놓기로 하자. ‘난 바르고 당신들은 다 틀렸다는 타인정죄의 자만(自慢)이 아니라 우리 모두 직시하고 고치자는 교회개혁의 자성(自醒)을 피하지 말자. 예수생명에 대해 알게 모르게 무덤덤해져 가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거울 앞에서직면하도록 하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을 상실한(딤후 3:5) ‘우리의 아픈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비로소 개혁의 발동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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