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와 기독론 담긴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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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와 기독론 담긴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고백
  • 박찬호 교수(백석대학교 조직신학)
  • 승인 2023.11.1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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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목사
박찬호 목사

사도신경은 주기도문과 십계명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어 많은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주기도문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면 십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요리문답이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그리고 십계명 해설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사도신경은 그 이름이 시사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사도들에게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12사도들이 사도신경을 만들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분들은 12사도가 만들었다는 것을 보다 극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사도신경의 믿음의 항목을 12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2사도 각자가 한 항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역사적으로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이름이 시사하는 것은 예수님의 12사도가 그 직접적인 저자들이라는 의미보다는 그들의 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당할 것이다.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삼위일체와 기독론과 관련하여 중요한 교회의 회의가 열렸음을 알 수 있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이 있었고 그 회의에서 채택된 것이 니케아 신경이다. 그런데 이 니케아 신경은 사도신경을 조금 확대해 놓은 것으로 보아도 무관할 정도로 사도신경과 그 내용이나 구조가 비슷하다. 381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회의가 있었고 그 때 니케아 신경은 일부 내용이 수정·보완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보통 교회 회의를 통한 교회의 공식적인 결정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사도신경보다 니케아 신경을 중시하기도 하지만 일선 교회에서는 니케아 신경보다는 사도신경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예배시간에 온 성도들이 함께 모여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한다.

사도신경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반대는 그것이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을 금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사도신경을 암송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 내용이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성경에 있느냐 없느냐를 너무 문자적으로 따지다 보면 삼위일체(Trinity)라는 말도 성경에 없기 때문에 부정하게 된다. 섭리(providence)라는 말도 직접적으로 성경에 등장하기 않기 때문에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신학용어가 성경에 없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요 그것도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이다. 마찬가지로 섭리라는 말이 성경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섭리론은 성경적인 교리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 성경은 ‘규범을 만드는 규범’(norma normans)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비하여 전통은 ‘규범화된 규범’(norma normata)이라고 주장한다. 사도신경도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규범을 만드는 규범인 성경을 통해 규범화된 규범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성경과 동등한 규범적인 지위를 차지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사도신경의 권위의 자리는 성경 아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도신경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다른 고백서들보다는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을 매우 높여 성경과 동등한 자리로까지 격상시킨다. 이와 관련하여 가톨릭교회의 반대 극단에 있는 것이 침례교회라고 할 수 있다. 침례교회는 가톨릭과는 반대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구호 아래 전통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다. 개혁주의생명신학에서는 성경과 부합하는 바른 전통에 대해서는 긍정하는 입장이다. 전통과 관련하여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하더라도 성경과 부합하지 않으면 버릴 용의가 있는 것이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함께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각각 다르다. “어떻게 예수 믿게 되셨어요?”라고 질문하면 다양한 사건사고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만난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은 아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다 다르고 다양하지만 그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의미가 그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도문이 아니니 굳이 눈을 감고 할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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