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신·구약 연구(9)
상태바
평신도를 위한 신·구약 연구(9)
  • 승인 2004.10.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경진의 신약 읽기

사복음서 <9> - '동방박사의 방문'

동방박사의 방문 기사는 사복음서 가운데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 독특한 이야기는 나름대로의 의미와 목적을 담아내고 있다.

첫째,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적 관심의 반영이다. 첫번째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서의 그리스도의 수난을 강조(막 10:45), 탄생 기사와도 같은 인간적 측면에서의 예수에 대한 정보가 희박하여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그리하여 후대에 기록된 마태·누가복음에는 이러한 부족을 보충해 보다 온전하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려는 의도가 내포돼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방박사 이야기는 주님 탄생과 관련하여 발생한 매우 중요한 기독론적 사건을 소개한다.

둘째, 마태복음의 신학 전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다. 앞서 이미 설명한 대로, 마태복음은 결코 유대인들만을 위한 제한적 복음은 아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이방인들인 동방박사의 방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페르시아 혹은 남부 아라비아에서 온 점성술사(귀족, 후대 전승에는 ‘왕’)로 간주된다.

그러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민 24:27) 타국인 이스라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를 경배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유대인들만의 왕이요 구주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왕이요 구주임에 대한 매우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마태가 소개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결코 유대민족에게만 국한된 제한된 복음이 아니라, 온 인류를 포용하는 보편적 복음임을 재삼 강조하기 위함인 것이다.

여기에 추가하여, 이방인들이 긍정적으로 묘사된 것은 마태복음의 공동체의 구성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데, 즉 마태 교회 내에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적지 않아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효의 이방인들도 함께 공존했고, 따라서 마태의 공동체는 유대인들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공존하는 혼합 공동체였음을 가리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셋째, 마태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단초를 제시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배경이 되는 신앙 공동체는 마가·누가복음의 배경 공동체와 비교할 때 경제적으로 볼 때 좀 더 부유하고 여유 있는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언뜻 황금, 유향, 몰약을 지적할 수 있지만(시 72:10-11, 15, 사 60:5-6), 동시에 그들이 고대 세계에 여러 달에 걸쳐 페르시아에서 이스라엘까지 그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었다면 그것 또한 그들이 재정적으로 넉넉한 형편임을 시사하는 증거일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누가복음의 탄생 기사에 등장하는 목자들은 거의 밑바닥에 위치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마태가 상대적으로 부유한 이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부유한 이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함을 통해 아마도 마태는 그들의 신앙과 행실을 더욱 격려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수·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박종수의 구약 읽기

모세오경 <9> - '애굽으로 피신한 아브라함'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그의 고향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당도한 아브라함의 가족에게 내려진 선물은 비옥한 토지와 보기 좋은 실과가 아니라 기근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이집트로 내려가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어느덧 하나님의 약속을 잊은 듯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선물로 주셨건만, 그는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내려간 것이다.

인간은 역시 환경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나 보다. 이집트로 내려간 아브라함은 큰 고민거리가 생겼다. 아내 사라가 너무 아름다운 것이 탈이었다. 이집트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 사라의 아름다움을 탐내어 자기를 죽이고 사라를 빼앗아 가면 큰일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사라를 불러 자기의 처지를 설명한다. 이집트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자신의 아내라고 말하지 말고 누이로 행세해 달라는 것이다. 사라는 일시적으로 이집트 왕 바로의 왕궁으로 들어가게 된다(창 12:19). 그 대가로 아브라함은 많은 선물을 얻게 되고 생명을 보존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그냥 넘기지 않으신다.

남의 아내를 취한 파라오는 큰 재앙을 겪게 되고 아브라함의 가족은 다시 재회한다는 이야기가 창세기 12장의 후반부를 차지하고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모양이 어떤가? 우리가 생각할 때 그는 비겁자요, 아무리 나이가 들어서 힘이 없다고 이해하려고 해도 자기 아내 하나 지키지 못한 겁쟁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 반해 석녀 사라는 어떤가. 아브라함을 탓하기는 커녕 아무 말 없이 남편을 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모든 수욕은 혼자 감당해 내야 한다.

성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와 야곱의 아내 라헬도 예쁘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가족은 예쁜 여인들이 많았나 보다. 문제는 이야기를 전하는 성경 기자의 의도가 우리의 관심과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대로 가나안에 당도한 아브라함도 자연의 재해인 기근을 피하기 힘들었으며, 생명의 위협 앞에서 약해질 수밖에 없는 한 평범한 인물이다. 여기서 성서 기자에 의해 그려지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사실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한 때 신앙심이 돈독하여 태산이라도 옮길 것 같더니 그것이 이내 식어서 눈앞에 닥친 재난에 이성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아브라함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 모두는 약해질 수밖에 없는 실존적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긍정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의롭기 때문이 아니요, 아브라함처럼 변덕이 많고 연약하기 때문에 사랑하신다. 아브라함은 그러기에 하나님께 기댈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교수·강남대 구약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