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토론 - ‘시국 기도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2)
상태바
연합토론 - ‘시국 기도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2)
  • 승인 2004.10.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국과 관련된 교계의 기도회가 최근 잇따라 개최되면서 이에 대한 여론이 확연히 갈리고 있다. “기도회를 빗댄 대 정부 압박용”이라는 비판과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는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순수한 기도회”라는 여론 등 기도회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았다.

찬성 - '나라의 위기 때 ‘구국 신앙’으로 기도'

최성규목사/순복음인천교회

월남 이상재 선생은 “진정한 애국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기독교 신앙으로 정신 무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과 함께 YMCA의 전신인 황성 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나라를 살리는 운동을 전개했다. 3.1 운동 당시에는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민족 대표 33인 중에서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처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살리는 일에 늘 앞장서 왔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한국교회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죄 사함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버려져도 좋다”고 기도했던 모세처럼(출 32:32),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며 수 일을 금식하고 눈물로 기도했던 느헤미야처럼(느 1:4), “죽으면 죽으리다”라는 각오로 민족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았던 에스더처럼(에 4:15~17) 한국 기독교와 성도들은 늘 나라의 위기 때마다 구국 신앙으로 무장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도 교회 안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교회의 기도 소리는 더욱 높았다.

지난 10월 4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대한민국을 위한 비상구국기도회’ 역시 같은 맥락에서 전개된 기도회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처음 기도회를 계획한 것은 ‘나라의 어려움을 통감하며 기독인들이 연합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자’는 순수한 신앙적 취지였는데, 이어진 다른 집회로 인해 그 취지가 희석됐을 뿐만 아니라 심하게 왜곡돼 버렸다. 게다가 언론이 다른 단체의 집회와 구국기도회를 도매금으로 취급하는 바람에 구국기도회의 의도는 더욱 왜곡되고 말았다.

비상구국기도회는 오직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현안을 볼 때 지금은 1천 2백만 모든 성도들이 엎드려 간구해야 할 때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성도라면 그 어느 누구도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할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비상구국기도회의 의도가 왜곡되어 전달됐지만, 나라를 위한 순수한 목적의 구국기도회는 우리나라 방방곳곳에서, 전국 각 처의 교회에서 계속돼야 한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의 교회와 성도들이 나라의 어려움을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고계신다. 다른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책임전가만 할 것인가? 나라가 어렵고 살기 힘드니 외국으로 떠날 생각만 하겠는가. 아니면 자조적인 태도로 처다만 보는 방관자가 되겠는가?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태도가 아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희망을 주셨던 과거의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눈물어린 기도를 듣고 싶어하신다. 교회를 향한 기도의 사명은 보수와 진보가 구분될 수 없다. 함께 손을 맞잡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어깨를 부여잡고 함께 기도해야 한다. 엎드려 기도하며 국론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자신의 욕심과 당리당략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대한민국이 살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해야 한다.

성도가 엎드리면 나라가 산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능력은 기도하는 자만이 체험할 수 있다. 나라의 어려움을 그냥 바라만 보지 말고, 우리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께 엎드리자. 대한민국이 살아나는 새 희망이 선포되기까지 우리의 기도는 계속돼야 한다.

반대 - '자기 욕심 버리는 것이 예수 정신'

김상근목사/교회협 일치위원장

지난 10월 4일에 있었던 시청 앞 기도회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집회가 정치적 사안을 다루었다 하여 반대한다. 70년대에 있었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도 그런 이유로 비판 받았었다. 이번 기도회는 7·80년대에 있었던 기도회를 비판했던 분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시위성 기도회를 그들도 수용한 것이다. 진일보한 것이다.

교회가 역사 속에 있고, 그 역사 속에서 성서적 진리를 증거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시국기도회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청 앞 기도회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첫째, 성서의 정신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시국기도회’이기 때문이 아니다. 기도회의 내용이 성서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둘째, 시대 정신에 역행하고, 역사의 대의를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3의 천년’에 들어왔다. 무력으로 남을 먹어 자기만 배부르게 하던 천박한 시대를 버리고자 한다. 서로 싸우지 않을 수 없게 했던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싸움거리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온 세계는 물론 자연까지를 아울러 공존공영하는 시대를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연을 침탈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일구어 내려는 것이다. 이것이 시대 정신이요 역사의 대의다.

이것은 성서의 정신에 부합한다. 전쟁과 살상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으려 한 예수의 정신에 근사한 지경에 오게 됐다. 온 피조 세계가 하나의 유기체로 회복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를 보고 있다. 평화의 시대를 여는 것이 성서의 정신, 예수의 정신이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그대로 지속시키고 있는 나라는 오직 우리뿐이다. 물론 시대의 대의가 이런데도 미국과 중국이 다음 시대의 헤게모니를 놓고 벌써 쟁투를 시작했다. 우리는 그 틈에 다시 끼게 됐다. 불행하고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세계 평화에 공헌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아니, 기회로 삼아야 한다. 남-북이 저 강대국들의 야욕과 열강의 이해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무엇이 예수의 정신과 성서의 가르침에 맞는 것인가를 분별해 그 길을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시청 앞에 모여 기도한다면 바로 이런 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지난 시기 북이 우리에게 저지른 못된 짓을 우리는 결코 용서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새 시대를 만들어 가고 계시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의 성정을 거슬러 성령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게 해주시라고 기도하는 자리였어야 했다.

지금 북의 우리 형제자매들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제 체제 유지에 골몰하는 북의 권력자들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을 지금 개혁과 개방으로 이끌고 계시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인내로 성령이 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강제해 주시라고 기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날 그 기도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유감이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기득권 때문일까? 지난 시기의 기득권은 반공주의의 산물이거나 독재와 정치 군인의 시혜물인 경우가 많았다. 혹 지난 시절 얻어 입은 낡은 외투가 소중하여, 그러나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을 모이게 했다면 이것이 세번째 반대 이유다.

세계는 반공주의의 연장선 위를 달리고 있지 않다. 우리의 정치와 사회도 상당한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이제 낡은 기득권의 외투를 벗자. 새 시대는 새 마음만이 만들어 갈 수 있다. 새 마음으로 함께 새 시대를 열어 가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