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샘물] 문설주에 바르는 양의 피와 팥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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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샘물] 문설주에 바르는 양의 피와 팥죽
  • 최운식 장로
  • 승인 2023.10.0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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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식 장로
최운식 장로/서울장위감리교회 원로장로,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크고 작은 재난이나 질병을 겪으며 살아왔다. 옛 사람들은 이것을 신의 노여움이나 징벌에 의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재난이 없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또 해를 끼치는 신들이 아예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 예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다. 한국에서는 동짓날 팥죽을 쑤어 대문에 바르고, 대문 앞에 뿌리는 풍습이 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은 7년씩 이어지는 풍년과 흉년을 슬기롭게 대처하여 이집트의 구원자로 칭송을 받는다. 요셉의 인도로 이집트에 이주한 야곱의 가족 70명은 430년을 사는 동안 번성하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후세의 이집트 왕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종으로 부렸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을 호소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명을 내린다. 모세는 이집트 왕에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한다. 이집트 왕이 이를 거절하자, 모세는 이집트에 아홉 가지 재앙을 내렸지만,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열 번째 재앙을 내릴 것을 예고하고, 할 일을 알려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명에 따라 일 년된 수컷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랐다. 그리고 길을 떠날 차림으로, 그 고기를 불에 구워서 무교병을 쓴 나물과 함께 먹었다. 그날 밤 하나님의 사자가 이집트 사람의 집을 찾아다니며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치셨다. 그러나 문설주와 상인방에 양의 피가 묻어 있는 이스라엘 사람의 집에는 아무런 해가 없었다. 열 번째 재앙을 당한 이집트 왕이 이스라엘 민족의 출발을 허락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탈출에 성공하였다. 유월절은 이를 기념하는 명절이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성주신을 비롯한 가신들에게 바치고, 대문과 그 둘레에 뿌리는 풍습이 있다. 동짓날 팥죽을 먹는 풍습은 고려시대 이색의 「목은집」과 이제현의 「익재집」에 이와 관련된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는 동지팥죽은 ‘역귀’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동지는 태양의 황경이 270° 위치에 있을 때로, 양력 12월 22일경이다. 밤낮의 길이는 하지로부터 낮이 차츰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다가 동짓날에 극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는 차츰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고대인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동짓날을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고도 하는 것은 동지가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절기임을 말해 준다.

팥죽의 주재료인 팥은 붉은 색을 띠는 곡식이다. 붉은 색은 밝은 태양, 활활 타는 불꽃을 상징하는 색이다. 이런 색을 귀신들은 무서워하고, 싫어한다. 그에 따라 민속에서는 붉은 색을 ‘축귀’, ‘축사’의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옛사람들은 질병이나 재난의 원인을 잡귀·잡신이 들은 때문이라 여겼다. 그래서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는 붉은 색이 들어가는 음식을 만들어 신에게 바치고, 나누어 먹으면서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였다.

동지팥죽에는 쌀과 함께 새알심을 넣는다. 쌀의 흰색은 태양의 빛을 상징하는 흰색으로, 신성의 의미를 지닌다. 찹쌀이나 수수가루로 동글동글하게 만든 새알심은 새의 알을 상징한다. 신화에서 알은 생명의 근원으로, 생산력을 상징한다. 따라서 팥죽의 쌀과 새알심은 흰색이 지닌 신성성과 새알심이 지닌 생산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동지팥죽에는 팥의 붉은 색이 지닌 축귀·축사의 의미, 쌀의 흰색이 지닌 신성성, 새알심이 지닌 생산력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매우 귀한 음식이라 하겠다. 작은설인 동짓날에, 이러한 의미를 지닌 팥죽을 쑤어 성주신을 비롯한 가신들에게 바치고, 대문과 문 둘레에 뿌리는 것은 잡귀·잡신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고,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유월절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는 것은 사람과 집짐승의 처음 난 것을 죽이러 다니는 천사에게 이스라엘 사람의 집임을 알려 재앙을 면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인이 동짓날 대문에 팥죽을 바르는 것은 잡귀·잡신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두 가지 풍습은 재앙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의 풍습은 성경에 기록됨으로써 종교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동지팥죽은 민속으로 전해 오다가 현대에는 그 의의가 약화되어 소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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