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계시만으로는 구원의 유일한 방법을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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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계시만으로는 구원의 유일한 방법을 알기 어렵다
  • 박찬호 교수 백석대
  • 승인 2023.08.3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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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 24) 특별계시의 필요성
박찬호 목사
박찬호 목사

사도행전 17장 16~34절까지 나오는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실패한 설교였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듣는 청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교한 것이라고 하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실패한 설교였다는 평가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지 않고 청중이 기존에 알고 있던 이방 사람들의 지식을 동원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실제로 행 17장 28절에서 바울은 그레데 시인 에피메니데스(BC 600년경)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그런가하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28)는 말은 시칠리아 시인 아라투스(Aratus, BC 315~240)와 클레안테스(BC 331~233)의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도행전 17장 외에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고전 15장 33절과 디도서 1장 12절에서 그리스 시인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아덴 사람들이 섬기고 있던 신은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이다. 이것을 접촉점으로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알게 해주겠다고 말하며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버려두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내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회개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그들의 잘못을 간과하였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으며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을 말하고 있다(31절).

당시 헬라 사람들은 영혼 불멸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전하고 있는 죽은 자의 부활은 그들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조롱하였고 설교는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수의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들 가운데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도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나중에 아덴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일반계시의 가치와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일반계시의 충분성을 주장하는 것 또한 조심해야 할 잘못된 입장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일반계시의 충분성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펠라기우스(c. 354~418)는 어거스틴(354~430)과 펠라기우스 논쟁을 벌인 스코틀랜드 출신의 수도사였다. 제국의 수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그에게는 못마땅했다. 너무나 세속적이고 부도덕하게 보였던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그 원인이 잘못된 신학에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어거스틴의 은혜의 신학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해악을 미치는 원흉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당시 베스트 셀러였는데 그 글 가운데 펠라기우스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명하시고 명하신 그것을 주십시오”라고 하는 어거스틴의 기도를 문제 삼았다. “명하신 것을 행하겠습니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펠라기우스의 주장이었다. 펠라기우스 논쟁은 문제를 제기하였던 펠라기우스가 418년 이단으로 정죄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교회 역사 속에서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추종하는 펠라기우스주의는 조금씩 형태를 바꾸어 등장하곤 하였다.

말하자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일반계시의 충분성을 주장하였고 일반계시에 기초한 자연 종교의 충분성을 가르쳤다. 종교개혁시대에는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일반계시를 불충분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18세기 이신론자들과 합리주의자 등은 다시금 펠라기우스를 따라 일반계시를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19세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영적 필요를 위해 충분한 것으로 보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곧 일반계시의 충족성을 허용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여 우리는 일반계시의 불충분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일반계시만으로는 구원의 유일한 방법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계시는 참된 종교의 기초 노릇을 할 수 없다.

일반계시의 불충분성과 특별계시의 필요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만일 일반계시로 충분하다면 굳이 특별계시는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일반계시가 불충분하다면 특별계시가 필요하다. 일반계시만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면 마치 뿌연 안개와도 같은 상황일 것이다. 하나 분명한 것이 없다.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상태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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