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경험의 유무, 신학자의 연구와 신학교육에 큰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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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경험의 유무, 신학자의 연구와 신학교육에 큰 영향
  • 박찬호 교수 백석대
  • 승인 2023.08.2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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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_(23) 목회와 신학
박찬호 목사
박찬호 목사

우리는 바울 서신을 마치 신학논문이나 되는 것처럼 접근하지만 바울 서신은 그 수신자가 교회가 되었든 그 어떤 개인이 되었든 목회적인 관심을 가지고 쓴 편지다. 바울은 여러 교회를 개척한 전도자요 순회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이나 칼빈을 우리는 신학자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들은 우선적으로 목회자였다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아프리카 북부의 히포(지금의 알제리의 아나바)의 주교였는데 주교로서의 그의 사역의 부담은 엄청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거스틴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희미한 불빛 아래 바쁜 목회일정을 쪼개어 초인적인 의지로 수많은 책을 집필하였고 이 책들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칼빈도 신학자이기 이전에 제네바 교회 목회자였다. 보다 정확하게는 제네바 의회에 의해 고용된 목회자였다.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인디언들과 백인들이 섞여 있던 접경 지역의 자그마한 교회를 사역하며 그의 4대 저작 <천지창조의 목적>, <참된 미덕의 본질>, <의지의 자유>, <원죄론>을 완성하였다. 이렇듯 우리가 아는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신학자이기 이전에 목회자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1812년 세워진 장로교 신학교이다. 북미주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 신학교라고 할 수 있다. 하버드 대학이 1805년 유니테리안 신학자 헨리 웨어를 교수로 채용하면서 하버드와는 별도로 1807년 앤도버 신학교가 회중교회 목회자 양성기관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앤도버 신학교를 시작으로 19세기 초반 북미주에 30여개의 신학교(seminary)가 세워졌다. 이른바 신학교육과 관련하여 세미나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하버드 대학은 1636년 뉴잉글랜드에서 회중교회 목회자 양성을 위해 설립되었다. 하지만 하버드는 이내 세속화되었고 이에 반발하여 1701년 예일 대학이 설립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1703~58)는 하버드가 아닌 예일에서 공부하였다. 세속화된 하버드 대학에 대한 공공연한 반항이 그 가운데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일 대학도 하버드와 마찬가지로 이미 에드워즈가 생존하던 시절 세속화 논쟁이 일어나 적잖은 논란에 휩싸여야 했다.

미국에서 장로교 목회자 양성을 위해 처음 세워진 대학은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인 뉴저지 대학이었다. 1746년 뉴저지 대학으로 설립되어 1896년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으로 개명하였다. 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이 미국에 망명하여 교수로 말년을 보낸 대학이자 아이비 리그에 속하는 명문대학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설립은 1차 대각성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하버드와 예일을 졸업하지 않으면 목사가 될 수 없었는데 하버드와 예일은 부흥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른바 이들 부흥운동을 반대하는 ‘옛빛파’(Old Light)에 대항하여 ‘새빛파’(New Light)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이 필요했고 윌리암 테넨트(1673~1746) 목사가 운영하고 있던 통나무 대학(Log College)의 전통을 이어받아 뉴저지 대학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뉴저지 대학과는 별도의 신학교인 프린스턴 신학교는 1812년 아키발트 알렉산더가 세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시작되었다. 아키발트 알렉산더는 19살에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27세인 1797년부터 햄던 시드니 대학의 총장으로 10년 가까이 재직하였으며 1807년부터 5년의 시간을 필라델피아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812년부터 1851년까지 알렉산더는 프린스턴 신학교 학장으로 재직하였다. 어느 정도 목회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아키발트 알렉산더를 이어 학장으로 재직하였던 찰스 하지나 벤자민 워필드는 그런 의미에서는 목회 경험이 없는 전문적인 신학자들이었다. 찰스 하지는 19세기 2차 대각성운동을 반대하였다. 이른바 구학파(Old School)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구학파 신학의 장점은 보수적인 성경관이다. 하지만 부흥에는 부정적인 것이 이들의 약점이었다. 다행히 우리나라 초창기 장로교선교사들은 평양신학교 초대 교장 마포삼열 박사를 비롯하여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 다수였는데 이들은 부흥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맥코믹 신학교는 비록 구학파에 속하였지만 19세기 후반 무디 부흥 운동의 본산이었던 시카고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성경관과 함께 부흥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선교사들이 한국 장로교회 초창기 선교사였던 것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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