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산책] 기독교에 대한 곡해된 풍설 팽배, 더 심한 것은 이론적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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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산책] 기독교에 대한 곡해된 풍설 팽배, 더 심한 것은 이론적 공격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3.08.1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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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 (165) - 기독교 신앙을 변증한 사람들(2)
이상규 박사
이상규 박사

기독교회에 대한 최초의 비판은 정통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교회가 이스라엘 선민들의 과거 역사와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을 때, 정통 유대인들은 분개하였고, 나사렛에서 난 사람을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로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이었다. 또 구약에 언급된 할례, 음식규례, 희생제사, 안식일 제도 등 모세의 율법에 대한 교회의 해석은 궤변이라고 배척하였다. <바나바 서신>에서 제시되고 있는 바와 같은 구약의 규례에 대한 우의적 해석은 모세에게 주신 불변의 가르침을 이방인들의 편견에 따라 손질한 이단적 변조였다.

그 다음이 이방인 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비판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점차 유대교와 거리를 두고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비판했지만, 이방인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못지않게 배타적이고 때로는 반사회적이라고 여겼다. 물론 그것이 오해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비판했고, 기독교회가 오랜 기간 박해를 받기도 했다. 기독교회에 대한 오해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를 비밀 결사로 보거나, 신자들의 모임에서 행해지는 성찬식을 인육식(人肉式)으로 오해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향하여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도 오해를 샀다. 피를 나눈 가족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하여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흔치 않는 일이었다. 어떤 점에서 이런 호칭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비로소 시작된 호칭이었다. 이 ‘형제은유’(sibling metaphor)는 에클레시아라는 개념보다 더 넓은 ‘몸으로서의 공동체’(고전 10:17, 12:27, 롬 12:5)를 말하는데, 동료 그리스도인을 칭하는 용어로서 바울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했던 용어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했던 이 형제, 자매라는 가족관계 은유는 곡해되었고, 이교도들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비밀리 모여 먹고 마시고 방탕을 즐기고 불을 끈 다음에는 근친상간과 혼음을 행한다고 여겼다. 이런 소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와 생활에 관한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런 풍설보다 더 심각한 도전은 기독교에 대한 이론적 공격이었다. 비교적 학식 있는 이교도들은 헬라철학의 논리로 책을 집필하여 기독교를 공격하고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주로 헬라 철학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 한 인물이 120년경 수리아 사모사타 출생의 루키아누스(Lucians of Samosada)였다. 에피큐리안 학파에 속했던 그는 180년경 <페레기너스의 죽음, De Morte Peregrini>이란 책을 써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신앙을 비방하였다. 이교철학자로서 기독교를 비난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켈수스(Celsus)였다. 2세기 후반의 인물로 플라톤 학파에 속했던 그는 178년경 <참 말씀, αληθης λογος>이라는 책을 써서 기독교를 비판하였다. 켈수스와 동시대 인물인 프론토(Cornelius Fronto) 또한 기독교를 이론적으로 비난하였으나 그의 글 역시 현존치 않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적대했던 또 한 사람은 포르피리우스(Porphyrius)였다. 신플라톤학파에 속했던 그는 15권의 책을 저술하여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로마의 역사가들의 작품에서도 기독교를 곡해하거나 오해하였고,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플리니(111년), 타키투스(115년), 수에토니우스(122년)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그리스도교 비난의 공통점은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미신이자 타락한 미신(superstitio nova et prava)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식자들은 공통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미신(superstitio), 혹은 해로운 미신(exitiablilis superstitio)으로 간주했다. 이런 비난 또한 오해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이를 변호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백석대·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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