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바람 없었던 16년,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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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바람 없었던 16년,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
  • 이현주 기자
  • 승인 2023.07.1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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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총회 유지재단 이사장 16년 임기 마친 박요일 목사

교회 위기 속에 시작한 유지재단, 총회의 든든한 울타리
흥광교회 가입으로 분쟁 중에 교회 지켜낼 수 있어 감사
유지재단은 법률적 근본단체, 교회법-세상법 일치돼야


“처음 유지재단 설립을 추진한 것은 우리 교회의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었는데 그로 인해 총회에 유지재단이 세워지고 오늘까지 이사장으로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제 생각보다 크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백석총회 유지재단은 박요일 목사(강성교회 원로)가 교회 주차장 부지를 총회에 내놓은 것을 계기로 지난 2007년 설립됐다. 초대 이사장을 맡았던 박요일 목사는 다섯 번째 연임을 이루며 총 16년 간 총회와 재단을 위해 봉사했다. 지난 1월 열린 임시총회에서 총대들의 동의를 얻어 임기가 연장됐지만 유지재단이 연금제도를 함께 운영하게 됨에 따라 적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지난 4일 인수인계를 모두 마무리했다.

유지재단 설립부터 지금까지 든든한 기초를 쌓았던 박요일 목사. 꼼꼼한 법과 행정, 그리고 철저히 원칙을 지키며 단 한 번의 잡음도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재단을 발전시켜 온 것은 그의 큰 공로라 할 수 있다. 박 목사는 “유지재단에 절대로 정치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교회법과 세상법에 일치하는 운영”을 당부했다. 
 
백석총회에 유지재단이 설립된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자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총회가 이렇다 할 자산이 없던 시절,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의지해서 교회의 법적 서류를 발급하고 있었다. 그때 강성교회 재산을 총회에 기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유지재단 설립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박요일 목사는 “나는 우연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총회 유지재단의 초대 이사장인 박요일 목사는 지난 16년간 단 한번의 잡음없이 안정적으로 유지재단을 이끌어왔다.
총회 유지재단의 초대 이사장인 박요일 목사는 지난 16년간 단 한번의 잡음없이 안정적으로 유지재단을 이끌어왔다.

박요일 목사는 예장 합동 출신으로 1970년대 후반에 예장 연합측이 운영하는 연합신학교 학감을 맡아 강의를 하고 있었다. 1981년 연합측이 지금의 백석총회와 통합을 이루면서 1987년에는 방배동 신학교에서도 강의를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백석 소속이 아니었다. 1996년에 이르러서야 제자들이 함께 하고 싶다는 제안에 강서노회로 가입했고 명예노회장을 역임했다. 

강성교회는 1975년 아들의 첫돌 헌금으로 예배당 신축과 동시에 개척됐다. 첫 성전은 1975년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세워졌다. 1978년 그리스도대학교 교수직에서 은퇴하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교육관을 지었다. 약사인 사모가 교회 옆에 대지를 구입해 기증했고 이어 예배당 지하실을 증축했다. 개척부터 꾸준히 가족들이 십시일반 헌금하며 교회를 부흥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1996년 양천구 신정동에 대지를 매입하며 백석총회에 가입했고 1999년에 대지 900평에 건평 1400평 규모의 새성전 입당예배를 드렸다. 이 성전이 바로 지금의 강성교회다. 2001년에는 교회 옆에 주차장 부지를 매입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당시에 교회 건축과 주차장 용지구입으로 30억원의 부채를 지게 되었는데 IMF사태로 이자가 막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성도들이 힘을 모으고 사모가 약국을 경영하며 이자를 부담하고 있을 때 교회 재산 문제로 갈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교회 안에 내홍이 생기니 걷잡을 수 없었다. 이때 교회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법인에 넣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박 목사는 당시 부총회장이었던 양병희 목사에게 유지재단 설립을 제안했고 양 총회장 임기 중인 2007년 5월에 주무관청이 문화관광부의 허가를 받아 ‘대한예수교장로회 유지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박 목사는 “유지재단 설립은 그 당시 양병희 총회장의 임기 중 역점사업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강성교회는 유지재단에 가입하자 교회 분쟁이 빠르게 진정됐다. 성도들 가운데 일부가 마음이 갈라지더라도 교회를 지킬 수 있는 안전한 울타리가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박요일 목사는 “유지재단 설립으로 교회를 지켰다는 점에서 내가 가장 큰 수혜자”라고 했다. 

박 목사는 이사장 임기 중에 가장 감사한 일로 흥광교회를 지켜낸 것을 꼽았다. 총회관 건립이 가장 큰 사건임에도 그는 “총회관 건립은 설립자님께서 앞장서 하신 일이지 내가 한 것이 없다. 설립자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총회관”이라며 자신의 공로는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다만 장원기 목사가 갑작스레 소천하셨지만 교회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유지재단 가입이 결정적이었고 본인 임기 중에 가장 잘된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장원기 목사는 내가 가르친 제자 중에서도 끝까지 예를 갖추며 나를 스승으로 대우해준 고마운 분”이라며 “개인적으로 만날 때마다 교회 새성전이 준공되면 유지재단에 바로 가입하라고 했다. 가족들이 들으면 서운할 수 있지만 너나 나나 내일 일은 모르는 것이니 교회를 재단에 넣어 보호하자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져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박요일 목사와 장원기 목사가 막역한 이유는 고향과 신앙의 이력이 비슷한 공통점 때문이다. 장원기 목사는 진도에서, 박요일 목사는 함평에서 자랐는데 그 지역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믿음의 가문에서 성장한 것이 평생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박 목사는 “장 목사나 나나 부모님이 쌓아놓으신 기도 덕분에 가진 능력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아 누리며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유지재단을 이끌면서 가장 아쉽고 죄송한 점도 언급했다. 유지재단 설립 당시 초대 이사회 구성에 설립자를 모시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는 “장종현 설립자님이 거절하고 양보했어도 끝까지 모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죄송할 뿐이다. 이사 한 명이 교단을 탈퇴하면서 뒤늦게 이사로 모시게 됐고 그 이후 설립자님이 유지재단은 물론이고 총회에 기여한 공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라며 감사를 표했다. 

16년의 임기를 마치고 이사회를 떠난 박요일 목사. 앞으로 재단을 이끌어갈 정영근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들에게 “유지재단이 대한민국의 민법 아래 운영되는 법적 기구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총회 안에는 무수히 많은 정치가 일어날 수 있지만 유지재단은 결코 정치에 휩싸여서는 안 되며, 정치적으로는 총회의 산하단체로 보일 수 있지만 법률적으로는 근본단체가 유지재단임을 강조했다. 유지재단의 위상이 확고하지 않을 경우 정치바람을 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재산의 수호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 또 “예수님과 바울도 로마법과 유대법을 다 지키셨다”며 “교회법과 세상법에 일치하도록 유지재단을 운영해달라”고 재차 당부했다. 

박 목사는 유지재단이 연금에 대한 책임도 맡게 됨에 따라 국민연금 중심의 안정적 시스템 구축을 당부했다. 연금은 돈이 오가는 것이기에 반드시 리스크가 따를 것이라며 가입자와 총회가 반반씩 부담하는 ‘국민연금’ 시스템으로 안정적인 연금제도 운영을 해나가길 부탁했다. 

총회 유지재단 이사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박요일 목사는 학교법인 백석대학교 이사장으로 학원선교의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 그는 “남은 생에 자신이 할 일은 세계 열방에 흩어진 백석동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학교와 총회가 가진 믿음의 순수성이 2대, 3대로 이어지도록 기도하며 백석 인재들이 세상 어느 곳에 있던지 인정받고 쓰임받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그렇게 그는 오늘도 예배당으로 가서 한 시간 동안 백석의 동문과 제자들을 위해 기도를 쌓고 있다. 총회와 학교는 마지막까지 그를 무릎 꿇게 할 영원한 기도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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