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신·구약 연구(5)
상태바
평신도를 위한 신·구약 연구(5)
  • 승인 2004.09.1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경진의 신약 읽기

사복음서 <5> 기독교는 유대교의 완성

마태복음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태복음의 구조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주제적 구조와 연대기적 구조이다. 주제적 구조 중 대표적인 것은 일찍이 벤자민 베이컨이 연구·발표한 모세오경적 구조이다. 연대기적 구조란 잭 딘 킹스베리가 주장한 것으로, 주제적 구조의 단점을 보완하여 마태복음을 연대기적 흐름을 따라 분석한 것이다.

마태복음 이해에 널리 사용되는 모세오경적 구조는 마태복음이 모세오경과 같이 다섯 권의 말씀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는 이론이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설교, 혹은 강화가 다섯 편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강화는 5~7장의 산상 설교, 두번째 강화는 10장의 제자(사도) 파송 설교, 세번째 강화는 13장의 천국 비유 설교, 네번째 강화는 18장의 교회 공동체의 질서에 관한 설교, 다섯번째 강화는 24~25장의 종말론 설교다. 이렇게 주님의 설교를 다섯 편으로 구분하는 것은 매 설교 끝에 반복되는 종결 후렴 문구를 근거로 한다.

·첫번째 강화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7:28). ·두번째 강화 =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11:1a). ·세번째 강화 =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13:53). ·네번째 강화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19:1a). ·다섯번째 강화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26:1).

이처럼 동일한 종결 후렴 문구가 반복되는 것은 저자 마태가 의도적으로 이 다섯 강화를 다섯 권의 책으로 묶으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 부르듯,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이 다섯 권의 강화를 일컬어 ‘마태오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마태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주님의 말씀을 다섯 권으로 묶어 마치 모세오경과도 같이 제시하려 했을까? 여기에는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의 마태 교회, 혹 공동체의 상황이 반영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상황이란 회당과의 갈등이 고조된 상태를 말하는데, 회당으로 대변되는 유대교에서 최고의 권위자는 모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태는 회당 유대교의 공격과 도전에 직면하여, 모세보다 더 위대하고 권세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기 위한 유력한 증거로, 예수님의 말씀을 모세오경적 형태로 제시했던 것이다. 또 이것을 통해 유대교의 완성이 바로 기독교임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세오경적 구조만으로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무리이고, 따라서 마태는 구약의 많은 예언들의 성취를 소개하고, 또 옛 사람의 글(모세오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대조해 주님 말씀의 권위를 부가시킴으로써(마 5:21~48; 5:21~22a), 예수님이 모세보다 위대하고, 기독교가 유대교의 아류가 아니라 완성임을 증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교수·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박종수의 구약 읽기

모세오경 <5> 가인과 아벨

창세기 4장에 소개되고 있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 행위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려진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땅의 소산으로 바쳐진 카인의 제물은 열납되지 않는다. 혹자는 양의 첫 새끼를 바친 아벨의 희생제사가 카인이 바친 곡식제물(素際)보다 더 잘 하나님께 열납된 것으로 이해한다. 또 어떤 이들은 카인과 아벨의 갈등을 농부들과 유목민과의 대립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레위기 2장 1절 이하의 기록에 의하면, 소제(素際)는 번제(燔際)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제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보여준다. 결국 희생제물과 곡식제물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자기가 바친 제물이 열납되지 못하자 이것을 본 카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카인 혼자서 야훼께 제사를 지내는 도중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도 분개(憤慨)했을까?

그곳에 자기 혼자만 있었다면 카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이유를 물어 본다든지 다시 제물을 바쳤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자기 옆에 아우 아벨이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제물은 열납되지 않고 아우의 제물이 열납된 사실 앞에서 카인은 이성을 잃고 동생을 죽이는 끔직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달리 생각해 보자. 만일 카인과 아벨의 제물이 동시에 열납되지 않았다면 카인이 아벨을 죽이려 했을까? 두 사람의 제물이 모두 열납되지 않았다면, 카인은 동생 아벨을 위로하면서, “아우야, 우리가 바친 제물이 어찌하여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단 말이냐?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죄를 지었을까? 자 이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자”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생의 제물이 열납되고 그의 입지가 강화된 것을 본 카인은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급기야는 살인을 하게 된다.

우리는 운명론적인 공동체 삶을 영위하고 있다. 우리는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며, 한민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공존 공생하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이후에 이브를 만들어서 아담과 이브가 함께 살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함께 산다고 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상대방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것이 항상 최고여야 하며, 자기의 주장만이 완전무결하며, 자기 지식이 항상 남의 지식보다 우월하며, 자신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항상 거룩하다는 생각들은 인간을 시기와 질투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교수·강남대 구약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