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토론 - ‘여성 안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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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토론 - ‘여성 안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승인 2004.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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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교단 총회를 앞두고 여성 안수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고 있다. 예장통합총회를 필두로 예성총회, 기성총회가 여성 안수를 전격 결의함으로써 여성 안수에 대한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또한 이번 총회에서 합동정통과 침례교가 여성 안수를 다룬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교계의 여론을 들어보았다.

찬성

한국교회 미래 위한 사려 깊은 결정

하영호목사/낙산교회

“여성은 목사가 될 수 없다!” “아니다, 여성도 목사가 될 수 있다.” 이런 논의를 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이 본문은 놀랍게도 여성 운동을 하는 분들도 싫어한다. “어떻게 여성이 남성을 돕는 배필인가?”

그런데 배필이라는 단어를 들여다보면 놀랍다. 이 단어는 여기에서만 ‘배필(helper)’이라고 번역됐다. 다른 곳에서는 구원자, 구세주, 즉 하나님을 지칭하는 어휘로만 사용된다. ‘하와’가 ‘아담’의 구세주라는 고백은 무엇을 뜻하는가? 창세기의 이 말씀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널리 읽혀지기 시작했다. 온 세상을 호령하는 이스라엘에게 겸손함을 심어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성 중심 시대에 이스라엘이 고대 중동지방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대에 이와 같은 신앙고백이 이스라엘의 뜻있는 분들 가운데서 소중하게 간직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역설적으로 홀로 살 수 없음을 통감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미국을 보자. 초강대국이면서 테러의 위협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테러리즘’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초강대국이 일방적으로 나가다보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음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사건이다. 미국의 공항에 들어갈 때면, 너무나 기분 나쁘다. 눈동자 사진을 찍고 온 몸을 뒤지고, 관광객을 죄인 취급한다. 불과 며칠 전 러시아에서 있었던 비참한 인질 사건과 진압 작전, 이 모든 것이 강대국의 독선에서 나온다.

서부개척시대에 유럽에서 이주해 온 백인들이 인디언이라고 불렀던 원주민들의 땅을 총칼로 강탈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 동물 모두가 어울려 ‘더불어 살기’를 원했었다. 빼앗은 사람들은 그들만 살기를 원했고, 빼앗긴 사람들은 더불어 살기를 원했었다니 참으로 역설적이다.

오늘 우리들이 사는 세상, 특히 우리나라를 보면 걱정을 안 할 수 없다. 여와 야, 노와 사, 남과 북, 영남과 호남, 진보와 보수, 나이 든 이들과 젊은이들, 남성과 여성 - 이런 식으로 나뉘어져 치열하게 싸운다. 함께 어울려 살아도 어렵기만 한데, 이렇게 갈라져 싸우니 너도 나도 힘들기만 하다. 나라와 민족의 내일을 조금이라도 걱정한다면, 치졸한 싸움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싸움을 부추기는 과정에 인간의 철학도 동원되고 심지어 성경 말씀도 인용될 것이다. 성경 말씀은 다양하다. 그 누구나 모든 말씀을 읽고 그대로 살 수는 없다. 때로는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도 하고, 서로의 생각을 격려해주기도 한다. 모두에 인용한 본문도 마찬가지다. 성경 말씀이 그러니 이를 인용해 여성에게도 목사 안수를 허락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안수를 받을 수 없다는 흐름이 싫은 것이다.

교회의 전통도 소중하다. 그러나 뜻 깊은 전통 못지 않게 오늘도 소중하고 다가오는 미래도 소중하다. 내일을 생각하며 사려 깊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 사실 여성이 안수를 받을 수 있는 교단에서조차 여성 목사의 수가 매우 적다. 목사 안수를 받으면 지 교회(local church)에서 일할 기회가 적어진다는 걱정 때문이다. 전도사로서 일할 기회는 있는데, 목사로서 일할 기회는 잘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총회가 결의를 한다고 당장 여성 목사가 목회 현장에서 목사로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남성들이 법적으로 진입 장벽을 치고 있다면 안될 것이다.

반대

평등한 존재이지만 ‘질서의 권위’ 존재

서창원목사/삼양교회

성경에서 남녀 관계는 동등성(sameness)이 아니라 평등성(equality)을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동등하시듯 남성과 여성의 본질(substance)이 같을 때 우리는 동등성을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인 남자를 언급하면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 지음 받았기 때문에 여자는 천사들을 인해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두라고 했다(고전 11:7~10). 이 말씀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구속함을 받은 주의 백성들을 수종들어 섬기는 위치에 있는 존재임을 감안할 때 적어도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속하여 섬겨야 할 자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때 여성들의 섬김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율법의 가르침이다(고전 14:34).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엡 5:22). 이것은 남성과 관련하여 여성의 위치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다루고 있는 남녀 관계는 지위문제가 아니라 질서 차원의 권위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동등이 아닌 평등관계다.

여성 안수 허용론자들은 그 길만이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성직을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별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일, 예수께서 사도로 세우시지 않은 일, 그리고 갈 3:28을 확신있게 주장하는 사도 바울도 그를 따르는 그 많은 여성들 중에 공식적으로 교회 지도자로 안수하여 세우거나 임명한 일이 없는 것을 우리가 무슨 권위로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교회의 모든 구조와 가르침 및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라야 한다. 몇몇 사람들의 주장이나 세상의 흐름에 편승한 제도 개선이 가능하다면 성경이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한국교회만큼 여성들의 활동이 많은 교회도 없다. 비록 목사나 장로, 안수집사직은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활동은 초대 교회 못지 않게 허용하고 있다. 지금의 논란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과 함께 세속적인 여권 신장 운동의 영향을 받아 교회가 요동치고 있는 일이다.

만인제사장 교리는 천주교의 사제제일주의에 반해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성도라면 누구나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지 성직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들도 만인제사장으로서 남성들과 평등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나아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평등한 자이지만 수행할 역할 차원에서 결코 동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구분을 나타내는 권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 안수가 성경적·교회 역사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교회 밖의 여권신장 운동을 주장하는 이들이 교회를 공격하는 빌미로 사용하는 것에 휩쓸려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려는 일부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현란한 지적 논리로 교회를 혼란케 하지 말아야 한다.

부활 소식을 처음 접한 여성들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부활의 메시지를 전파할 설교권까지 여성에게 허락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 내에서 여성들이 할 일들은 여전히 열려 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얼마든지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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