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와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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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와 건강
  • 송태호 원장
  • 승인 2021.02.0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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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사 송태호의 건강한 삶 행복한 신앙-41

병원이 1층에 위치하고 있어 가끔 대기실 창 밖을 바라본다. 2층에서 내려다 본 거리가 추상적이라면 1층에서 내다 본 거리의 풍경은 구체적이다. 우리 병원 앞은 오거리라서 유동인구가 많다. 날이 추워서보다는 코로나 19 때문에 위축되어서 예전 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적긴 하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 없이 노점상들이 병원 앞에 진을 치고 있다. 과일장수, 건어물장수, 방물장수, 건과류장수, 화훼장수, 약초장수 등 종류도 무척 다양하다. 가만히 보면 자기들끼리 요일을 정해 놓고 나오는 것 같다. 자기 직장이 우리 병원 앞인 것이다.

물건이 빨리 팔리면 빨리 들어가고 잘 안 팔리면 오랫동안 좌판을 펴고 있다. 몸을 써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 분들도 크고 작은 병들 몇 개씩은 가지고 있고 결국은 우리 병원 단골 환자들이다.

2층에 있을 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일들 중 하나는 내 점포 앞의 눈을 치우는 일이다. 눈을 치우지 않으면 벌금이 부과된다고 한다. 벌금이 무섭기도 하지만 우리 병원에 방문하신 연로한 어르신이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눈이 내리면 병원 앞을 치워야 한다. 눈을 치우는 일은 나와 직원들의 공동업무다. 누구든지 먼저 출근 하는 사람이 치우고 있다. 

하지만 나는 눈이 온 날은 30분쯤 더 일찍 출근하여 병원 앞의 눈을 치운다. 올 초 눈이 많이 와 조바심을 내며 병원에 출근 했는데 어라! 병원 앞의 눈을 누가 다 치워 놓았다. 알고 보니 병원 앞에서 노점을 하시는 분이 아침 일찍 나와 치워놓은 것이다. 내가 이 곳에 병원을 차리고 난 후 위장병으로 자주 진료 받으시는 환자 분이기도 하다. 어리둥절한 나를 향해 “좀 일찍 나와서 쓸었습니다. 눈이 없어야 저도 장사하니깐요”라며 계면쩍은 미소를 흘리는 그 노점상에게 따뜻한 믹스커피 한잔을 건넸다.

염치는 청렴할 염(廉)과 부끄러울 치(恥)가 합쳐진 한자말이다. 국립국어원은 염치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했고, 단국대 동양학연구소는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치거나 할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상태를 염치라고 했다. 

나는 후자의 해석이 좀 더 맘에 든다. 어쨌든 그 노점상은 항상 우리 병원 앞을 무단으로 사용해 영업하면서 점포 주인인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에, 즉 염치가 있었기에 무엇이라도 도울 일이 없나 하는 생각에 눈을 쓸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견과류장수는 갓 볶았다며 땅콩을 가져왔고 , 화훼장수는 진료 받으러 왔다가 병원 내 화분이 시들하자 분갈이를 해 준 적도 있다. 돈을 지불하려 했지만 그 분들은 한사코 거절했다. 결국 나도 노점상의 상품을 샀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나에게 물건을 팔려는 마음보다는 나에게 신세를 지고 있고 그 신세를 갚으려는 마음이 더 크다고 하겠다. 이런 마음은 역시 역지사지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의사의 경우라면 능력이 안될 때 빨리 치료가 가능한곳으로 환자를 보내는 것이 가장 염치 있는 행동일 것이다.

염치 없는 행동이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국민을 위한 공직에 나서면서 능력이 충분한 지를 다투는 청문회에서 자기의 잘못이 드러나도 뻔번하기 이를 데 없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세상에 없는 로맨스가 되고야 만다. 법 통과를 목 매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무시한 채 정쟁으로 일정을 소모하는 국회의원 등 높으신 분들 뿐 아니다. 연락처가 없이 불법 주차 해 놓은 차량 때문에 응급실에 가야 하는 아기 부모가 발을 동동 구르고,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시설에서 아이들의 버릇 없는 행동을 가만 놔두고,  응급실에서 정말 중환자를 보는 의료진에게 빨리 봐주지 않는다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들은 모두 자기만을 생각하며 상대편에서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염치의 반대말인 파렴치 혹은 몰염치하다는 말을 듣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심지어 일반 범죄자보다 파렴치범을 더 비난하기도 했다.

예수님도 성경에서 창녀를 돌로 징치하려면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나와서 치라는 비유로 염치가 있어야 함을 말씀하셨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의학적으로는 몰염치한 사람들이 조금 더 건강할 수도 있다. 스트레스를 덜 느끼기 때문이다. 몰염치한 사람들은 ‘신경성’ 이라는 병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몰염치한 인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는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내 속의 염치를 조금만 키워보자. 그러면 조금 더 좋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송내과 원장·중앙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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