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열며 - 목적을 상실한 세상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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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를 열며 - 목적을 상실한 세상의 비극
  • 승인 2004.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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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설목사 / 문래동교회

군사독재정권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희생시켰고 국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것은 온 국민의 간절한 열망이었다. 당시 대학생과 젊은이들, 지식인들은 독재 권력에 맞서 싸웠다. 80년대의 젊은이들 가운데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여당을 지지하면 시대의식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뿐인가. 금서로 지정된 책을 읽어야 의식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데모를 못하는 사람은 용기 없고 비겁한 사람으로 취급당했다.

이유야 어떻든 그 시대는 열사·투사로 불렸던 사람들이 참 많았다. 민주화투쟁을 한다는 사람들은 자유, 진리, 정의, 민족이라는 단어들을 마치 자신들의 특허품이라도 되는 듯이 사용했다. 그러나 주관적이기는 했지만 신학교에서 내가 경험해 본 운동권 사람들은 너무도 이중적이었다. 자신의 생활에 성실하지 못했고 밤과 낮의 행동이 너무도 달랐다. 이른바 386세대들은 민주화 투쟁을 위해 젊은 날을 희생했다는 명분이 너무 강하다. 그들은 민주화 투쟁에 나갔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이력이다. 민주화를 위한 옥살이는 병역의 의무를 하는 것 이상으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군사독재를 타도하고, 자신이 원하는 정권을 탄생시킨 주역들은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그들이 당한 많은 고난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고난이 얼마나 한이 많은 일인지는 모른다. 민주화의 영령이 되었거나, 그 일로 개인의 인생을 잃어버린 사람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건강하게 살아있는, 그래서 여전히 세상을 호령할만한 힘과 지혜가 있는 그들에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

투쟁을 끝낸 자들이 다시 야인(野人)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권력의 주변을 맴돌면서 어떤 보상을 요구하며 권리를 행세했다. ‘나도 할 만큼 했으니 한몫 챙기겠다’는 심사가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근본적인 이유들이었다. 군사독재와 싸워왔던 사람들이 그랬고,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켰다는 386 세대들마저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목적을 상실한 세상은 민주화도, 정직한 도덕적 사회도 이룩하지 못했다.

얼마 전 탄핵정국의 사슬을 넘어서 살얼음판 위에 17대 국회를 겨우겨우 세웠다. 3백여 명의 입법의원들 가운데는 필자의 말에 해당하는 의원들이 있으리라 본다. 필자의 염원이 있다면 좋은 건물 값을 하는 국회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국회는 한 국가가 만든 모임이요, 나라의 일을 논하는 자리다. 과거의 관행을 답습하는 국회가 된다면 국민들은 정치권 전체를 심판하는 민중봉기를 일으킬 것이다.

북한의 용천역 폭발 사고를 보면서 그들이 우리 동포들이기에 인도주의 정신에서 돕자고 나섰다. 그러나 도와주는 과정 가운데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강원도 땅에서 생산된 시멘트를 어쩌라고 배로 운송해서 중국의 단동 땅을 거처 용천 지역으로 보내야 하는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민족 분단의 치욕스러운 모습을 중국인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강원도에서 용천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는가? 집안일을 이웃집을 거쳐서 해결하려는 못난 생각과 행동이 싫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서글픈 현실이다.

국정을 맡은 사람들, 그리고 백성들이 조국의 미래를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목적을 상실한 사회, 표류하는 국가는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된다. 그것은 야욕(野慾)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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