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더 무서운 공포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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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더 무서운 공포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0.06.23 1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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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70년 ‘예배를 지킨 사람들’

순교 각오하고 교회를 지킨 믿음의 열조들 많아
포화 속 드려진 야전 예배, 예배는 병사의 버팀목
“예배와 기도회 후 인천상륙작전 승전 소식 전해져”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6월이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 대부분은 이제 사라져가고 있지만, 전쟁의 상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하필 6.25 70년을 맞는 지금 또다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정전상태임을 느끼게 한다. 또 한편에서는 코로나19 위기가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다. 그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한동안 현장 예배를 중단하기도 했다. 현장 예배가 재개됐지만 교인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전쟁 속에서도 예배를 드리고자 했던 믿음의 선배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전쟁 한복판에서 그들에게 예배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예배를 방해하지 말고 기다리라”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수많은 신앙인들이 있다. 특히 교회를 떠날 수 없다며 예배당을 지키다 공산당에게 끌려가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예배당은, 예배는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서울 영락교회 옛 예배당 앞에는 김응락 장로의 순교비가 서 있다. 김응락 장로는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있던 미군이 서울을 집중 포격하던 때, 예배당 건물이 걱정이 되어 피신 중 영락교회 예배당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교회에는 후퇴한 줄 알았던 공산군이 머물고 있었다. 왜 찾아왔느냐는 공산군의 물음에 “기도하러 왔수다”고 대답했던 그는 본부로 쓰고 있던 경찰서에 끌려갔다. 철수를 준비하던 북한군은 그를 끌어냈고, 죽음을 예감한 듯 김 장로는 돌계단을 오르며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찬송을 불렀다. 

그는 북한군에게 교회에서 잠시만 기도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기도 후 그는 45세 나이에 그토록 사랑했던 예배당을 바라보며 순교했다. 

이북에서 월남해 서울 후암교회에서 사역하던 김경종 목사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부산으로 피난시키고 홀로 예배당을 지켰다. 그는 “북에서도 양들을 두고 온 제가 서울에서 또 도망친다면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라며 끝까지 남아 결국 순교의 길을 걸었다. 

77명이 집단 학살당한 전남 영광의 염산교회. 공산군이 교회를 점거하자 김방호 목사는 교인들의 가정들을 돌면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렸다. 후퇴하지 못했던 공산군 잔당들은 무차별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도륙했다. 심지어 교인들은 서로 줄로 묶여 돌멩이를 매단 체 교회 옆 바다 속에 산 채로 수장됐다. 

가정집에서 몰래 예배를 드리던 김방호 목사도 1950년 10월 27일 공산군에 끌려가 일가족 8명과 함께 순교했다. 

6.25 당시 영광에서만 수많은 신앙인들이 순교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국군에 의해 완전히 수복된 후 1951년 2월 24일 염산교회에서 드린 첫 예배, 김방호의 차남 김익 전도사와 교인들은 숨겨두었던 성경과 찬송가를 들고 다 타버린 교회를 찾아가 하나님께 예배들 드렸다. 그리고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만경교회 김종한 담임목사는 1950년 9월 25일 새벽기도를 인도한 뒤 예배당에서 혼자 기도하다가 공산군에게 순교를 당했다. 교인들은 피신을 권고했지만 그는 교회를 버리지 않았고, 이 교회에서는 15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경남 합천의 박기천 전도사는 1950년 7월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던 중 들이닥친 공산군에게 “예배를 마치고 나갈 테니 예배를 방해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다그쳤다. 공산군은 주일에 하는 일을 시키면 놓아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주일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고 거부하다 결국 총살됐다. 6개월 뒤 발견된 시신은 기도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죽음의 공포를 물리칠 수 있던 이들 순교자에게 과연 예배가 갖는 무게감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지 가늠조차 어렵다. 

전쟁터 절망에서 일으킨 예배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참혹한 전장 터에서도 예배는 드려졌다. 6.25 전쟁은 남북 당사자 외에도 유엔 결의에 따른 참전국 군인들이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 가장 많은 군인들이 참전한 미군에는 많은 군종목사들이 있었다. 

최대 180만 명이 참전하고 3만3천 명이 전사할 정도로 희생이 많았던 미군. 그 중 야전에서 13명의 군종목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힌 군인들을 위해 기도해주었고, 주일이면 천막을 쳐서 예배당을 만들었다. 여의치 않으면 나무 그늘 아래 간이 강단과 의자를 만들어 예배를 드렸다. 병사들은 개인 휴식보다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한국전쟁이 남긴 유산 중의 하나는 군종목사 제도이다. 해방 후 해군 손원일 제독의 영향으로 정달빈 목사가 입대해 군목으로 활약했지만, 정식 군종제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6.25가 발발하고 전쟁이 한창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지휘문서 하나를 하달했다. 

“군종목사가 각 군대에 들어가서 일하고 있는 줄로만 믿고 있었는데, 아직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면 하루 속히 사람을 택해서 들어가서 일을 하게 하라.”

당시 미군 제30사단에서 복무하던 한국인 카투사 병사가 “성직자가 군에 들어와 가병들의 가슴을 신앙으로 무장시키고 기도로 두려움을 없게 해 달라”는 편지에 화답한 것이다. 그렇게 국군 군목 280여 명은 전쟁터 예배당에서 사역하며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제주도에는 1952년 세워진 ‘강병대교회’가 있다. 전쟁터에 보낼 병사들을 훈련시키던 육군 제1훈련소가 있던 곳에 세워진 강병대교회에서 수많은 병사들은 예배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했을 것이다. 유엔 참전국 군인들도 제주 모슬포비행장에 내리면 반드시 강병대교회에 들렀다 갔다고 한다. 뜻밖에도 전쟁 동안 각지 수용소에도 예배당이 자그맣게 만들어졌다. 

포로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이 있었다. 절망만 가득할 것 같은 전쟁터 곳곳에서 예배는 믿는 이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동력이었다. 

피난민 교회, 회개운동과 구국기도회
1950년 한국전쟁 초기 수많은 피난민이 몰렸던 부산. 지금도 부산에서는 교회 창립일이 같은 교회들이 적지 않다. 바로 1950년과 1953년 사이 설립된 교회들이다. 모든 가산을 내려놓고 내려온 피난민들에게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큰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예배를 내려놓지 않았다. 이북 지역 교회를 부산에 재건하는 노력들도 있었다. 

백석대 이상규 석좌교수(역사신학)는 ‘6.25 동란 중 피난지 부산에서 있었던 회개집회 혹은 회개운동’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부산의 교회들은 피난민들로 가득 찼고, 교회 마당은 피난민들의 천막이 세워지고 임시 거주지로 변했다”며 “그 당시 부산으로 내려온 목회자와 성도들은 전시 하에서도 회개집회와 구국기도회를 계속해서 드렸고, 그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일주일 동안 새벽기도, 낮 성경공부, 저녁집회가 진행됐다”며 “설교자들은 신사참배의 죄와 한국교회의 대립과 분열이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인식하고 말씀을 전했고, 집회에서 회개의 역사, 통회 자복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전했다. 

초량교회, 부산중앙교회 등지에서 1~2주간 기도회를 마쳤을 때 성도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전세의 변화가 기도 때문이었는지는 하나님만 아실 것이지만, 성도들은 예배와 기도가 갖는 힘을 분명 느꼈다. 그들의 예배는 중단되지 않았고, 지금 한국교회가 있을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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