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욕심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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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욕심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됩니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7.09.15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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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으로 생명 전하는 성악가 강내우 교수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비판적이고 의심 많은 성격은 끊임없이 증거를 요구했다. 노는 것이 좋았고 손에서는 술, 담배가 떠나지 않았다. 그랬던 강내우 교수(버금벨칸토성악아카데미, 여의도순복음교회 미가엘 찬양대 지휘)가 이제는 전 세계를 돌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노래하는 성악가가 됐다. 동시에 믿음으로 두 아이를 입양한 아버지로 한국입양홍보회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예전의 그에게 찬양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악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강 교수의 꿈은 세상에서 제일 슬픈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대중가수였다. 재능도 있고 자신도 있었다. 고등학생 때 벌써 KBS 부산가요제 대상을 타고 가수 협회 회원증을 얻을 정도였다.

마냥 노래가 좋았지만 어떤 길로 나가야 할지는 잘 몰랐다. 스무 살이 되자 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세종대 음대 성악전공에 입학했다.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던 ‘부산 사나이’에게 서울은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나름 노래에 자신이 있었는데 서울에 와보니 날고 기는 실력자들이 너무 많더군요. 성악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대중가수가 되기 위한 길도 너무 좁았어요. 대학 졸업 시기가 다가올수록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커졌죠.”

불확실한 진로로 고민하던 그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외로움이었다. 선원이었던 강내우 교수의 아버지는 그가 열 살 때 스페인으로 가셔야 했다. 아직 어린 그와 형을 어머니가 홀로 키우셨지만 두 형제가 모두 성인이 되자 어머니마저 스페인으로 떠났다. 졸업을 앞두고 방황하던 25살 청춘을 위로해 줄 어른이 없었던 것이다.

이역만리의 부모님과 국제전화를 할 때면 외로움에 흐느껴 울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를 달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우야 교회에 한번 나가보렴. 하나님은 살아 계시단다.”

그 말을 듣고 뒤늦게 입대한 군대에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좋은 기억을 안고 제대 후 다시 상경하자마자 온누리교회를 찾았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교회에서 100미터쯤 떨어져 택시에서 내리는데 교회를 보자마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날로 교회에 등록하고 7주 과정의 새신자 교육을 받았다. 신앙생활은 지치고 힘들었던 그에게 많은 위로를 줬다. 말씀은 은혜로웠고 성도들은 친절했으며 모든 것이 좋았다. 하지만 분위기에 익숙해지자 비판적인 본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감정적인 노래를 부르며 감동을 주고받는 게 하나님 은혜의 비밀일까? 이런 감동은 세상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뜨겁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들에게서 발견한 공통점은 새벽기도였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새벽기도를 작정했다.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몰라 하나님께 따져 물었다. “하나님 살아계십니까? 저를 좀 만나주세요. 살아계시면 증거를 보여주세요.”

그렇게 몇 달을 하나님과 씨름하듯 기도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새벽기도를 드리던 어느 날, “나도 너를 기다렸다”는 음성이 들렸다. 그 순간 불타오르듯이 뜨거운 무언가가 몸 속에 들어왔다.

“그때까지 저는 제가 죄인인 줄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 날 어려서부터 제가 지었던 모든 죄를 보여주시더라고요. 눈물 콧물을 모두 쏟으며 회개했어요. 증거를 보여 달라고 기도했는데 알고 보니 온 세상 만물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였어요.”

그의 삶은 하루아침에 완전히 달라졌다. 하루에 두 갑씩 피워댔던 담배를 냄새조차 맡을 수 없었다. 술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습관처럼 입에 붙은 욕도 거부감이 들어 입 밖으로 뱉을 수 없었다.

유학 이후 찬양사역 결심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기도하자 성악을 계속 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응답을 받고 제대한 지 얼마 안 돼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너무 확실하게 마음을 주셔서 모든 것이 잘 풀릴 줄 알았다. 그런데 이탈리아에 도착해보니 유학 중인 한국인 성악가만 3천 명이었다. 이 악물고 도전했던 콩쿠르에서 20번 넘게 1차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로마에서 다시 새벽기도로 하나님께 엎드렸다. 사실 대부분 교인이 성악가인 로마한인교회에는 세 가지의 불문율이 있었다. 새벽기도 금지, 통성기도 금지, 한국어 찬양 금지가 그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는데 그 사람의 목을 상하게 하실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금기 세 가지를 모두 하겠다고 결심했다.

계속된 새벽 통성기도로 목이 점점 아파오자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 중에 손 같은 것이 목으로 쑥 들어오는 경험을 했다. 그때부터 갑자기 소리를 내는 발성 방법이 달라졌다. 알고 보니 그렇게 터득하려고 애쓰던 이탈리아식 벨칸토(‘아름다운 노래’라는 뜻) 창법이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했더니 발성을 선물해주신 것이다.

발성이 바뀐 후 당당하게 콩쿠르에 재도전했다. 자신만만했지만 결과는 또 다시 1차 탈락이었다. 실망하던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1등이 된 후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보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찬양하길 원한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하지 말라는 찬양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자비량으로 미주지역에 한 달 동안 찬양 투어를 계획하고 8개월 동안 기도하며 준비했다. 놀랍게도 찬양 투어를 결심한 순간부터 콩쿠르에 8번 연속 입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높아지고 나면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내 달란트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결심한 순간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더라고요.”

“입양은 나도 살리고 아이도 살립니다”
찬양으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강 교수가 또 하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있다. 바로 가슴으로 낳은 자식들과 함께하는 믿음의 가정이다. 그는 재작년부터 햇살이와 이슬이 두 딸을 입양했고 올해 2명을 더 입양하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다.
입양은 다음세대를 향한 고민에서 시작됐다. 자신이 부모님을 통해 복음을 알게 됐듯이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 고민의 끝에 눈에 띄었던 것이 입양이었다.

“입양은 선교라고 생각해요. 믿지 않는 한 사람을 완전히 전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한 아이를 자식삼고 평생을 두고 섬기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이겠어요?”

첫 아이를 입양하며 하나님께 이 아이를 맡겨드린다고 기도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이 아이를 너에게 맡겼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는 자신이 이들을 사랑으로 양육할 책임이 있는 청지기임을 깨달았다. 강 교수 가정은 아이를 입양하며 유기견을 함께 분양 받았다. 아이들에게 만남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그는 늘 아이들에게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이 달라지고 좋은 부모를 만나면 자식들의 삶이 달라집니다. 입양에는 많은 자격이 필요하지 않아요. 화목한 가정과 화목한 부모가 돼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요즘 출산율이 바닥을 찍고 있는 추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이를 자신의 경력에 방해처럼 여기는 분위기도 한 몫 한다. 하지만 강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내가 주체인 삶에 아이가 짐이 되는 것이 아닌 내가 아이의 삶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빠’라는 사명을 위해서라면 젊음을 바쳤던 음악마저도 내려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가정이 똑바로 설 때 사회가 회복됩니다. 입양은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축복이에요.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우리 부부가 열 명의 아이를 입양하고 또 이 아이들이 열 명의 아이를 입양해서 백 명의 입양 명문가를 꾸리는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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