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편법이 기독교 위기 앞당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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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편법이 기독교 위기 앞당겨
  • 승인 2003.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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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몇몇 대형교회는 시대에 뒤진 기업 경영원리를 배워 문어발식 확장을 시도해 왔다. 목회자의 유명세에 따른 교회 브랜드를 사용하여 다른 지역에 서너 개의 지교회를 세웠고 최근에는 수십 개의 교회를 세워 ‘신(新)사도행전’을 쓰려고 하는 교회도 있다.

경험하고 있는 중이지만 지교회에서는 독자적인 설교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관리자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교회 창립자의 카리스마를 각 지역으로 확산시키려는 통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청의 하부구조로 존재했던 교회에게 독자성을 되찾아 준 것이 종교개혁이었건만 오늘의 교회는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논리가 크게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에 왜 그렇게 많은 돈이 몰리는지도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지만- 암흑시대로 불리는 중세의 교회는(12-13세기) 고리대금업을 하는 상인계급들을 하나님의 것(시간)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보고 교회에 발들이지 못하게 했었다- 기존 지역 교회들의 존재 기반을 흔들 만한 물질적 투자를 동반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대형 할인점에 의해 소형 슈퍼마켓들이 폐점되는 경우와 비교될 상황이 교회에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교회는 그 자체로 완결된 독자적인 구원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지표여야 한다. 특정 목회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의 설교만이 전달되어야 하는 사적 공동체가 아닌 것이다.

성도라 불리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살림살이를 위해 이 땅에 부름 받은 존재이며, 교회는 그 살림살이의 원칙을 배우고 익히는 곳이다. 하나님의 종말 역시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지 이 세상 외의 별천지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J.몰트만).

주지하듯 살림살이란 살리는 일을 사는 인간의 총체적 몸짓을 말한다. 가정 내 어머니의 역할이 구체적 모습일 것이다. 모두가 먹을 것을 위해 울부짖는 현실에서 하나님 역시 모두를 살리는 현명한 생태학적 경영자(시편 104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 그 말의 본래 뜻 또한 다음과 같다. 즉 하나님이 당신이 지은 피조물들에게 지속적으로 은총의 행위를 베푸시듯 그 은총행위에 상응하는 존재로 살아가라는 것이다(C. 베스터만). 당신이 지은 자연 및 인간세계가 허무한 것에 종노릇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 일을 위해 우리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신의 피조물이 탄식하며 울부짖고 있다고 말한다(롬 8:18 이하). 불행하게도 19, 20세기 신학과 교회는 자신의 고유 영역을 인간 영혼으로 한정시켜 버렸다. 전 자연을 과학에게 내맡겨 버린 채로. 과학의 열매를 따먹기는 해도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문제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기독교 복음 역시 자본주의적으로 해석되어 ‘많은 것이 좋다’(More means better)는 논리로 전파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이 세계를 살릴 힘을 상실했고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치유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

세상을 구원할 원대한 꿈을 접고 자신들만의 자족적 집단으로 존재하려 할 뿐이다(D. 벨).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의 행적은 죄 용서와 병자 치유로 집약된다.

특히 치유란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인간의 몸, 사회 내 구조적 문제, 나아가 전 우주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죄 용서와 치유 행위는 실상 둘이 아니다. 따라서 죄의 문제를 인간 영혼과만 관계시켜 협소하게 이해하는 교회는 반쪽의 진리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틴달로스의 신화로 오늘의 교회 모습을 진단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틴달로스는 제우스의 아들로서 그의 눈 밖에 나 일생을 물 속에 갇혀 지내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자신의 몸이 목까지 물 속에 잠겨 있으나 정작 목말라 물 한 모금 마시려 할 때마다 물이 빠져나가 영원히 목마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일생을 물 속에 갇혀 있으나 영원히 목마른 존재 틴달로스, 그가 오늘 우리 기독교인의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무슨 일일까? 일생을 교회 속에 머물지만 영원히 목마른 양들이 많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가인의 에토스를 벗어나려는 교회의 몸부림이 없다면, 거룩을 빌미로 편법을 일삼는 교회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 주변에는 점점 야위어 가는 양들만이 차고 넘칠 것이다. 예수가 오신 것도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종교개혁 기념일을 지나며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민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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