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에 사용된 '복음주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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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에 사용된 '복음주의 신학'
  • 승인 2003.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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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스케빙톤 우드는 “웨슬리의 설교에서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웠던 ‘은총으로만’과 ‘믿음으로만’의 표어가 메아리쳤다고 했다. 웨슬리는 복음을 말함에 있어 먼저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 구원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다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제시하곤 했던 것이다.

2. 성화의 과정과 단계
신학에서 성화를 논할 때 보통 신분상의 성결과 경험적 성결로 구분한다. 즉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신분상으로 성별된 자이기에 성도라고 칭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험적 성화를 말하게 된다.

3. 기독자의 완전의 특징
웨슬리에 의하면, 온전한 성화(성결) 곧 기독자 완전은 신자가 (내재적인 죄에 대한)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서 마련하신 성화의 은혜를 받는 것이다. 곧 신자는 온전한 성화의 단계에서 모든 내재적인 죄에서 씻음을 받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종사하기에 합당한 능력을 은혜로 받는다.

그러기에 웨슬리는 이를 기독자완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은혜는 육신을 가지고 사는 현세에서도 얻을 수 있는 은혜라고 가르쳤다. 이 점에서 웨슬리는 신자가 육을 가지고 있는 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전제하는 칼빈과는 입장을 달리한다.

4. 맺는말
요약에서 웨슬리의 성화의 메시지의 핵심은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복음이었다. 우리 죄인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신 구원은 온전한 구원, 온전한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웨슬리가 그의 구원론에 있어 경험적인 성화를 강조함으로 신자의 생활과 교회 생활에서 새로워질 것이 촉구됐다.

모름지기 초보의 믿음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 대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 깨끗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랑의 생활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성결의 메시지는 18세기 영국교회와 사회를 부흥케 하였다. 이런 운동은 19세기 미국에서의 성결-오순절 운동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

조종남 박사에 대한 논평 조종남박사가 웨슬리의 성화론을 통해 다루고자 했던 주요 신학적 관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동의하면서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신학이 지닌 고질적 병폐현상인 이원론적 경향성을 극복하고 통전적 신학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방법론적 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둘째로, 웨슬리의 성화의 개념을 단지 교리적 측면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를 묻기 보다는 사회적 측면에서 어떠한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는 점에서 교훈점을 주고 있다.

셋째로, 웨슬리신학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자의 완전’을 기독교 진리의 역설적 특성과 연계해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배현성교수<한세대>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랑
애굽으로부터 약속의 땅을 향한 이스라엘의 여행을 묘사하는 출애굽기의 노정표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모세오경 전체에서 그들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오경에서 그들은 자주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서사적 전통들을 가진 제사장 문서적인 구성장치와 주기화한 골격을 취한다.

프랭크M. 크로스는 애굽으로부터 르비딤까지의 6개 노정, 그리고 시내광야로부터 모압까지 6개 노정 구조를 제시한다.

광야노정의 신학적 중요성
그들이 존재하던 이전의 공간인 애굽으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신광야에서 그 여행의 극치로서 그들의 공간과 정체성에 대한 재정의는 하나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신존인 신광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순례백성으로 재 정체화 하는 이스라엘의 전환에 골격을 구성한다.

한정된 광야여정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생각을 제한하는 것은 나타난 주요 신학적 주제들이 애굽의 과거 시공간으로부터 신에 의해 창조된 분리가 상징적인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광야 이전의 신적인 교훈에 의하여 지시된 새로운 시공간의 예측이다.

전환의 신학
이 신학적 검토의 중심은 사건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바탕에 깔린 미덕에 의한 것이지만 출애굽기에서 광야를 통한 이스라엘의 여정이다. 광야에서의 그 삶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쓴 물 안에 한 나무를 던지라고 지시하셨고 그래서 달아진 마라에서 지시된 것이다.

여호와의 교훈인 토라는 생명을 주며, 쓴 물을 달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생존할 수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도록 강요된다. 그런데 그 광야는 프레데임이 주장하는 것처럼 버려진 땅도 아니며, 세상의 창조 당시부터 쓸만한 곳이어서 도움이 되는 곳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새 창조에 의해 살게 하려고 그 황량한 곳에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

모세오경에서 이집트로부터의 이러한 분리와 새 삶으로의 전환은 결코 잊혀질 수 없다. 이스라엘은 그 땅에 결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공간적으로가 아니고 실존적으로도 아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에 도달하는 것은 현지 백성들로부터의 계속되는 분리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레더 박사에 대한 논평
레더 박사의 성경에 대한 다면적 접근은 성경의 보화를 케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매우 적절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몇가지 명료하게 가려져야 할 점들이 있다. 첫째는 방법론으로서의 내러티브 기법이다.

그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본문 뿐만 아니라 여정에 대한 보다 정교한 문예적 분석이 있었더라면 그의 주장에 더욱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의 군사적 성격을 지적하고 있다. 셋째는 도상학에 관한 것이다. 넷째는 어희에 관한 것이다. 다섯번째는 신학적 의미에 관한 것이다. 그는 출애굽 여정의 도상학을 이용하여 출애굽의 그림을 생생하게 만드는 시도를 했다. 손석태총장<개신대>

'자유주의적인'에 반대말로 사용 ‘복음주의적’이란 단어 사용을 묘사하기 위해 각기 다른 단어들을 사용한다. 그 첫번째는 ‘복음주의적’이란 단어에 대한 종교개혁의 사용이다. 독일 문화에서 이 단어는 복음주의적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종교개혁의 루터 진영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신학적인 전망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 등 종교개혁의 그 위대한 ‘오직’이란 용어로 묘사될 수 있다.

두번째 사용은 18세기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의 주요 배후 세력이 된 17세기의 ‘경건주의’에 그 뿌리를 둔 것이다. 독일 사람은 이것을 경건주의 또는 부흥운동이라고 표현하려 한다. 이러한 신학의 흐름은 ‘성화’를 그것을 종합하는 원리로 사용한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경험에 입문하는 것은 ‘중생’으로 묘사되며, 그 용어는 ‘칭의’를 변화하는 경험인 ‘성화’의 시작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예컨대 믿음과 이성, 믿음과 행위, 성경과 전통 등 사고의 연접적인 방법을 전제하는 좀 더 보편적인 구원론이다.

세번째 사용은 20세기 근본주의 운동과 근본주의에 대한 논의 이후에 일어났다. 독일 사람들은 로잔 복음주의협의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 영어 단어에서 유래한 ‘복음적인’이란 단어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경향을 신학적으로 묘사하기는 어렵다.

대 연합을 형성할 수 있기 위해 ‘총칭적인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 신학적인 특이성은 포기한다. 복음주의의 가장 특이한 성격은 소위 ‘보수주의 대 자유주의의 패러다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흐름은 ‘보수적인’ 또는 ‘정통적인’ 또는 ‘전통적인’과 동의어로 그리고 ‘자유주의적인’의 반대말로 사용한다.

보수주의 대 자유주의의 패러다임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고대의 교회들의 보다 고전적이고 고상한 교회의 전통들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저급한 교회에 속한 복음주의자들의 널리 보급된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보수주의 대 자유주의의 패러다임의 문제들에 대한 좀더 본질적인 예는 현대 ‘복음주의’의 사료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슨 박사에 대한 논평
데이튼 박사의 논문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도전을 가져다 주고 있다. 데이튼 박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복음주의를 통상적인 시각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도전을 준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복음주의는 ‘본질적으로는 논쟁에 붙여진 개념’이다.

여기에 대해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하지만 그는 여기서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가 그것에 대한 램과 마스틴의 해석에 대해 복수를 한다. 데이튼은 우리가 복음주의를 ‘보수적/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 따라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구별은 ‘근본적인 범주오류’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통주의는 복음주의를 바라보는 잘못된 기준이다. 복음주의는 그 본질에 있어서 정통주의라기보다는 경건운동이다. 심재승교수<천안대>

복음주의 뿌리는 18세기 경건운동 1. 복음주의 신학의 배경과 뿌리
미국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는 19세기 영국에서 발견되어지는데 웨슬레 운동의 발생과 함께 부수적으로 일어났다고 본다. 혹은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가 18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에서도 발견된다고 할 수 있겠다.

미국 20세기 초엽의 복음주의 신학은 놀랍게도 교단적인 경계선을 초월할 숭 있었다. 그 당시에 미국에서 교단적인 연합들 속에서 복음주의는 연합 감리교회, 연합장로교회, 복음주의적인 루터파교회, 폭넓은 남부침례교회들의 광범위한 연합에 기도하였다.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미국 근본주의자들이 신봉하는 핵심교리를 그대로 주장하고 있다. 그 기초와 함께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침례교회들에서 널리 지지를 받고 있으며, 초기 감리교회에서는 지지를 받았으나 최근 연합감리교단에서는 별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는데 웨슬레안 전통에서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다.

2. 개혁주의 신학
개혁신학은 복음주의 신학의 개념규정보다는 훨씬 그 개념을 설명하기가 용이하다. 그 뿌리는 16세기 종교개혁에 두고 있으며, 대륙에서는 요한 칼빈의 신학에 그리고 영국에서는 요한 낙스의 신학에 연결되어 있다.

미국에서의 개혁신학은 통상 특정한 교단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매우 큰 장로교회들과 작은 장로교단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아주 큰 개혁교회 교단들과 작은 개혁주의 교회들을 포함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이 좀 더 협력적으로 일해야 할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보게된다. 그 협력은 넓은 범위에서가 아니라 특정한 영역에 제한된 것이다.

3. 결론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학파는 죄악 속에서 죽어가는 남녀들에게 제공할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참으로 아브라함에게서 우리가 배우는 바와 같이 그의 하인들은 싸우지 말았어야 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삼키려는 찾고있는 사자들이 바로 우리의 대적자들임을 신약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믿음을 가진 가족들 사이에서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탄과 그의 고수들을 대항하는 것이다.

갬블 박사에 대한 논평 이 논문에서 갬블교수는 복음주의 신학과 개혁신학을 각각 정의한 후에 두 입장 사이의 긴장관계와 연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주된 의도는 이 두 신학 전통이 함께 연합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의 상황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문의 가장 큰 의의는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의 연합을 역설했다는 점이라고 본다. 또 개혁주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의 관계를 실천적인 이슈들과 연관지어 밝힌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논문 제목에 의하면 개혁주의 신학은 복음주의 신학에 어떠한 연관성을 갖고 있느냐 하는 주제인데 내용을 볼때 제목 따로 내용 따로 인 심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 한상화교수<아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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