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중국집 ‘동해반점’의 비법은?
상태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중국집 ‘동해반점’의 비법은?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6.12.07 16: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철가방 오토바이를 탄 스타강사…대구 동해반점 사장 박권용 집사
▲ 불우한 시절을 이겨내고 작은 중국식당을 경영하면서도 더 어려운 이들을 돕고 짜장면을 만들어 대접해 자랑스러운 시민상, 장관상 등 수십 개 상을 받고 역대 대통령들에게 특별초청까지 받아 ‘유명인사’가 된 그는 오늘도 철가방 오토바이를 타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러 다닌다.

대구 봉덕3동에 있는 동해반점 사장 박권용 안수집사(대흥교회)는 소문난 스타강사로 유명하다. MBC ‘칭찬합시다’의 주인공으로 KBS ‘아침마당’ 등 수많은 매스컴을 탄 그는 연단에만 서면 3분 만에 청중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며 웃음보가 터지게 한다. 

초등학교 3학년 중퇴인 그 앞에서 공무원, 경찰, 학교, 구청, 문화교실, 군부대, 교회 등 다양한 청중들이 웃다가 울다가 이내 머리를 끄덕거리게 된다. 그건 그의 걸쭉한 입담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삶의 진정성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강연을 했으면 강연료만으로도 벌써 부자가 됐을 것 같은데, 그는 아직도 탁자 네 개뿐인 “쪼매난” 중국집 사장이다. 배운 게 “국수 빼는 기술밖에 없는” 그는 고아원, 양로원 등 여러 복지시설과 노숙자들에게 짜장면을 만들어 주었다. 그가 만들어준 짜장면 그릇을 다 쌓으면 아마 하늘까지 닿을까? 적어도 그 정성만큼은 닿고도 남을 것 같다.

아직도 월세 살면서도
이뿐 아니다. 없는 형편에도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며 불우한 이웃과 어린이들을 후원하곤 했다. 그 덕에, 그는 아직도 철가방 오토바이를 부르릉거리며 강연장에 갔다가 쫓겨날 뻔도 하고, 보증금 1500에 월세 50인 가게에서 살고 있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시절을 살아봤기 때문에 어려운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세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서 할머니가 저를 키웠고, 열 살 때엔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초등학교 3학년에 중퇴를 하고 중국집에 가서 13년을 일했습니다. 거의 노예였어요. 맨날 무쪼가리만 먹고 살면서 주인에게 맞아 피가 줄줄 나는 머리엔 다꽝(단무지)을 잘라 붙인 적도 많고요. 손이 다 터서 저녁마다 돼지비계 발라 연탄불에 쬐며 그렇게 살았죠.”

살아남는 비결은 중국음식 기술 배워서 중국집을 차리는 것뿐이었다. 참고 견뎌야 했다. 23세에 마침내 주방장이 됐고, 방위로 군복무를 하게 됐다. 제대증을 찾으러 가다가 한 아가씨를 만났다.

“그 아가씨와 함께 밥을 먹게 됐는데, 밥은 안 먹고 밥상 앞에서 한참 뭘 중얼거리더라고요. 뭐하냐고 물어봤더니 기도하는 거래요. 기도가 뭔데요, 물었더니 예수 믿는다고 해요. 그때부터 그 아가씨가 예수님이 누군지, 십자가가 뭔지, 교회가 뭔지 설명해주더라고요.”

그 ‘아가씨’와 결혼한 그는 교회를 다니게 됐지만 남의 집 주방장으로서 주일을 지키기는 쉽지 않았다. 주일날 교회 가자는 아내에게 “내 반점을 차리면 나간다”고 했더니 그때부터 아내가 반점을 차리게 해달라는 기도를 시작했다. 

“어느 날 주인이 나보고 무단히 나가라고 해요. 아무 이유도 없이, 13년이나 부려먹고요. 그때가 성탄절이었는데 참 암담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쫓겨나서 반점을 차리게 됐습니다. 나가랄 때는 절망이었는데, 그게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사장님이 된 그는 친절과 정성을 다했다.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귀했다. 오죽 했으면 어떤 아지매가 울면서 “짜장면 두 그릇에 그렇게 절을 많이 해가지고 남겠나”할 정도였다. 

“지 혼자 잘나면 아무데도 못 써먹습니다. 붙임성이 있어야 되거든요. 손님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돼야죠. 오장육부 자존심 쓸개 다 내려놓아야 장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은 정성이죠. 재료입니다.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낌없이 재료를 넣으니까, 맛있는 겁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
자기 반점을 가지게 됐지만 주일성수는 쉽지 않았다. 아내는 문 닫고 교회 가자고 했지만 빚 걱정에 일하는 사람 월급 줄 걱정, 그 사이에 손님 오면 어떡할까 걱정 등으로 주일을 지킬 수 없었다. 어쩌다 단체 손님이 오면 득달같이 교회로 달려가 아내를 불러오기도 했다. 

“마음은 편하지 않았죠. 호박 썰면서도 눈물이 났어요. 나만 가면 아내와 안 싸워도 되는데 하면서요. 그런데 어느 날 꿈을 통해 하나님이 제 마음을 녹이셨어요. 그날 새벽부터 교회를 나갔죠. 주일날 완전히 문을 닫자는 결단도 내렸고요. 그리고 주일날 교회 가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찬송을 부르는데 세 살 때 엄마 떠난 일부터 고생 고생한 게 떠오르면서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섬기던 교회가 건축문제로 어려워지면서 부목사와 함께 개척교회 멤버로 참여하게 됐다. 처음엔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교회 장소가 필요했다. 당시 짜장면 2800원 할 때인데, 어렵게 모아둔 2천만 원 통장을 헌금했다. 교회 종탑도 세웠다. 전도도 그의 몫이었다.

“짜장면 하는 사람은 전도가 잘 돼요. 두 그릇 달라는 거 세 그릇 주고, 다섯 그릇 달라는 거 여섯 그릇 주고, 교회 한번 가자고 하는 거죠. 우리 집에 계란 대주는 사람에게 교회 좀 나와 내 얼굴 좀 세워달라고 하고요, 우리 교회 부흥 못하면 내 돈 떼인다고 하면서요. 그렇게 해서 우리 교회 나왔던 사람들이 지금은 집사 부부가 됐어요.”

때로는 노동시장에 나가 일당 줄 테니 교회 가자고 해서 전도한 이들도 있었다. 예배 때 졸면 “내가 돈 주고 사왔구만”하면서 깨우고, 끝나면 점심 대접하고, 이렇게 매주 일당 주고 데려오면서도 한편 “이 심령이 언제 변화 되겠나” 했는데, 어느 날 “박 사장, 돈 냅 둬라. 내일부터 그냥 나갈게”하는 기쁨도 경험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지금은 다들 권사가 됐다.

현재 1500명 교인으로 성장한 이 교회에서 장로를 선임할 때 일이다. 아쉽게도 그는 장로로 뽑히지 못했다. 이 일로 시험 당한 몇몇 교인들이 함께 교회를 떠나자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교회에 낸 돈도 받지 못했고 내가 한 종탑도 뽑아갈 수 없으니 나는 못 떠난다”고, 말은 걸쭉한 그의 입담처럼 위악하게 했지만 그의 신앙 양심으로 볼 때 떠나는 건 옳지 않았다.

▲ 불우한 이웃들에게 짜장면을 대접하려고 만드는 박 집사의 얼굴은 힘들어도 늘 웃음이 넘친다

손이 마비되도록 반죽해
“사실 있는 게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죠. 그래도 신앙의 가치는 그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기분대로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니라 말씀대로 신앙생활 해야죠. 내 맘에 안 맞는다고 해도 지키고 있는 게 순종이라고요. 그런 마음으로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제게 ‘장로 되면 목사님 애만 먹인다, 너는 짜장면 만들어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그때부터 시작된 그의 짜장면 선행은 끝이 없다. 수십 명 교회부터 수백 명 교회까지, 사람들을 초청해서 짜장면도 대접하고 간증도 하고 그 가운데 결신자도 생겨났다. 한번은 소록도에 가서 한센 병 환자들에게 짜장면을 대접했다. 천여 명을 대접하려니 재료비만 수백만 원이 넘었고, 밀가루 일곱 포대를 반죽하다보니 나중엔 손이 마비됐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힌 손이 생각나더라고요. 눈물 납디다. 저는 손에 보람을 둡니다. 손엔 선과 악이 공존하잖아요. 악한 손은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오지만, 주는 자의 손은 자자손손 복을 물려주는 손이 됩니다.”

그의 두 아들은 지금 목회를 하고 있다. 큰 아들은 호주 열린문교회에서 행정목사로 있고 둘째는 개척을 준비 중이다. 두 아들이 모두 목회자가 되어 남들은 “복 받았다”고 하지만 그는 “눈물 받았다”고 말한다. 

요즘 모든 매스컴에서 맛집 탐험이 유행인데, 평범하게 보이는 작은 중국집 ‘동해반점’이지만 아마 오늘 예수님이 짜장면 드시러 오신다면 이 집 문을 드르륵, 여실 것 같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로 박 집사 부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6:1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