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돔과 암몬의 고향 '요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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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돔과 암몬의 고향 '요르단'
  • 승인 2003.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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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눈과 백향목의 나라, 현대 인구어의 기본형이 되는 페니기아 알파벳을 창안한 민족, 지중해 무역을 석권하고 바알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던 땅, 아랍국가이면서 유일하게 기독교가 공인된 국가.

오늘날의 레바논을 소개하는데에는 오히려 써야할 지면이 모자라고 수식어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우리나라 경기도 넓이만한 땅(1만 4백 평방㎞)에 4백만 명이 채 못되는 인구가 살고 있는 작은 나라 레바논은 가나안 한 모퉁이에 둥지를 튼 이후 숱한 영욕의 세월을 거치면서 역사의 오솔길에 크고 작은 문명의 기념비들을 수없이 많이 세워 놓았다.

그러나 값진 고대 유적지들과 빼어난 자연경관들은 오래 지속된 전란으로 말미암아 가시와 엉겅퀴가 우거진 돌무더기 밭이 되고 말았고 찾는 이들의 발걸음마져 거의 끊겨버려 유령같은 적막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을 헤치며 다마스커스로 되돌아 왔을 때 역광장의 시계는 자정을 훨씬 더 넘긴 시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 아침 기온은 조금 쌀쌀했지만 따가운 햇살은 이곳이 지구촌에서 가장 뜨거운 열대지방의 한 언저리임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원래 요르단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두 딸과의 근친 상간을 통해 낳은 모압과 암몬이 주축이 되어 세운 나라이다. 사실상 이스라엘과는 친족관계에 있었으면서도 언제나 적대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최근에는 영토와 난민문제로 서로간에 살벌한 긴장관계가 조성되고 있다.

사무엘서 기자는 암몬과의 전쟁시에 있었던 한가지 비극적인 사건을 소개해 주고 있다(삼하 10:1~3). 암몬 군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을 때 다윗왕은 왕궁 위를 거닐다가 이웃에서 목욕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불러오게 해서 동침을 하였다.

임신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다윗은 충직한 맹장 우리아를 불러 온갖 향응을 베푼 후 강압적으로 아내에게로 가게 하였다. 그런데 워낙 훌륭한 부하인지라 전쟁 중에 혼자 호화스럽게 지낼 수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결국 전쟁터로 되돌아 가버렸다.

이에 다윗은 군대장관 요압으로 하여금 우리아를 최전방에 내보내도록 함으로써 기필코 그의 생명을 빼앗고 말았다.

이러한 피빛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옛 암몬성은 앙상한 건물 잔해들을 드러낸 채 덧없는 세월의 흐름을 탓하고 있는 듯 하였다. 성에서 내려와 암만 시내 이곳 저곳을 둘러 본 후 요르단 순례답사의 첫 시작을 북쪽 방향으로 잡았다.

여러 개의 민둥산을 지나 한참 달려가다가 얍복강 근처에 이르러 잠시 차를 멈추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하란으로 도망가서 20여 년 동안 머물다가 처자식을 거느리고 이곳 강가에 와서 밤을 지새우게 된다. 그때 소리없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과 더불어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를 걸고 밤새도록 맞붙어 싸우게 된다.

이 수수께끼 같은 기상천외의 씨름판은 결국 날이 밝아 오면서 끝장이 나기는 했지만 야곱으로서는 환도뼈가 뿌러지고 허벅다리를 저는 엄청난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브니엘에서 거둔 야곱의 승리는 한 민족의 이름인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

20여 킬로 정도를 더 올라가자 거대한 돌기둥 아취가 오랜 세월의 침묵을 깨고 제라쉬(Jerash) 마을 안으로 이끌어 주었다. 이 아취의 공식 명칭은 하드리안 방문 기념 개선문인데, 아마도 로마 황제 하드리안이 제2차 발 코크바 유대반란을 평정한 후 이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개선문이 아닌가 한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시온산 성전터에 쥬피터 신전을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치욕적인 이교숭배를 강요했던 악명 높은 독재자 군주였다.

이곳 제라쉬의 옛 지명은 거라사(Gerasa)였는데,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이곳을 지나가시다가 무덤 사이에서 나와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의 몸을 해하고 있는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막 5:1~20).

그들이 돼지를 치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유대인들과는 거의 연관성이 없는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요단강 건너편 데가볼리 지방 안에 속해 있던 거라사는 로마의 박해정책에 강력히 항거하다가 몰살을 당하거나 팔레스틴에서 쫓겨났던 유대인들과는 달리 로마의 지배에 순종하고 그들의 신상도 숭배했기 때문에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평화를 누리면서 크게 번창할 수 있었다.

제라쉬 안에 있는 노천극장과 시장, 신전 등 옛 건물의 잔해들은 그들의 사치와 풍요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었는가를 단번에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제라쉬의 부귀영화는 주변 국가들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다가 홀레구가 앞장선 천하무적 몽고병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돼지떼가 바다에 몰사했던 사건은 정녕 거라사의 앞날에 대한 계시적 경고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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