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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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거북이
  • 여상기 목사
  • 승인 2016.04.12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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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기 목사 / 예수로교회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는다. 공교롭게도 그날을 코앞에 두고 20대 총선이 치러진다. 가라앉은 진실을 왜곡하는 파렴치한 적폐가 아픔을 외면한 채아직도 사회 심층에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날의 아픔을 앞으로도 계속 기억해줄 것을 촉구한다. 어느 교회 주보엔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고, 실종자 9명의 이름은 굵은 글씨로 표기돼 있다. 나열된 이름 뒤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주보를 받은 교우들은 저마다 눈시울을 붉힌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눈을 감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타자에게 기대하거나 요구할 근거도 권한도 없다. 우리는 망각의 늪에서도 망설임 없이 세월호의 침몰은 한국호의 침몰임을 자명하게 통의(通義)할 수 있어야한다.

이번 20대 총선의 민의(民意)는 당락과 승패에 관계없이 여기서부터 관철되어야 한다. 국가와 국민들의 안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리당략과 자신들의 정략과 이해관계에 따라 합종연횡(合從連衡)과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는 구태의연한 정치행태는 이제 그만 근절되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를 풍미하는 지배 원리와 사조(思潮)는 토끼와 거북이의 자유경쟁이다. 원초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 않은 채, 강자와 약자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약육강식의 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토끼가 낮잠을 자지 않고 행여 거북이에게 뒤질세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달려간다면, 이는 처음부터 승패가 결정된 게 아닌가.

만약 현실에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가 불가피한 것이라면, 불공정한 경주를 시정하기 위한 제도적 방안들이 합리적으로 정비되었을 때, 거북이와 같은 존재들도 비로소 안심하고 경주에 참여하게 되지 않겠는가.

흙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이 경쟁 조건의 불공정성에 불만을 제기하며 경주에서 탈퇴하는 일은 스스로 인생의 패배자와 낙오자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는다. 우화 속의 거북이는 경기를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 속의 민초(民草)들은 생존과 생계의 멍에 때문에 억울함을 감내하며 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민심(民心)을 읽어낼 줄 알아야 천심(天心)을 얻는다. 세상의 정사나 권세는 힘의 축으로 전환하지만 하나님의 다림줄은 언제나 마음과 믿음의 중심을 가늠하신다.

교회정 치도 마찬가지다. 소위 지도자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인위적인 방법으로 인맥의 줄을 세우고, 조직을 장악하는 구태의연한 정치행태와 아집과 독선과 이기심의 굴레를 스스로 벗어버려야 한다. 모름지기 교회는 하나님(theos)과 정의(dike)의 신정정치(theodicy)의 기틀 위에 회중(demos)이 주체(kratia)가 되는 민주주의(democracy)의 모판이 되어야한다. 사람이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면 의관이 바른지를 알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나라의 흥망성쇠의 도리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잘잘못을 알 수 있는 법이다(魏徵).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길 구하기 전 우리가 하나님편에 있는지를 살펴볼 일이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에게 빵 대신 벽돌을 던져주시기도 한다. 어떤 이는 그 벽돌을 던져버리지만 어떤 이는 그 벽돌을 모아 삶의 주춧돌을 만들기도 한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 그리고 고통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제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하는 시대는 지났다. 거북이는 물에서 놀고 토끼는 산에서 놀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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