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싸움판에 교회 숟가락?
상태바
밥그릇 싸움판에 교회 숟가락?
  • 운영자
  • 승인 2016.03.22 21: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석찬 목사·예따람공동체

‘정치’(政治)를 영어로 ‘politics’라 한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polis)에서 따온 말이다. 폴리스 주민들은 공평하게 나라 운영에 참여했다. 그들은 생활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라고 생각했다. ‘정치’(政治)는 ‘바를’ 정(正)자에 ‘칠’ 복(攵)자가 합쳐졌다. ‘칠’ 복(攴)은 ‘치다’ ‘채찍질하다’의 뜻이다. ‘다스릴’ 치(治)자는 ‘물 수’(水)변에 ‘삼태성 태’(台)인데 ‘태’(台)자는 ‘별’의 뜻만이 아니라 ‘기르다, 양육하다’의 뜻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정치’라는 말은, ‘물 흐르듯 바르게 세상을 다스려 기른다’는 마음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야만 ‘정치’라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이 정치일까? 정치라고 말할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오늘의 정치는 조롱과 혐오 대상이 되었다. 해외 누리꾼은 ‘politics’를 ‘poly’(많다)와 ‘ticks’(피 빨아 먹는 진드기들)의 합성어라고 하며, 정치는 ‘피 빨아 먹는 진드기 집단’이라고까지 비아냥한다.

정치판이 4.13선거를 앞두고 혼란스럽다. ‘물 흐르듯’은 없고 온통 역류가 만든 소용돌이 뿐이다. ‘국민을 위하여’라고는 하지만, 국민은 안중에 없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을 모르는 국민이 없다. 그래도 그들에 의해 국민의 삶, 국가의 미래가 영향을 받으니, 무한대로 모른 척 할 수도 없다. 오히려 두 눈 부릅뜨고 거룩한 참정권(參政權)을 바르게 사용고자 하는 마음을 추스러야 할 때이다.

오랜 세월 동안 가까운 벗으로 지내왔는데, 정치적 입장 차이로 의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정치를 대화의 주제로 삼다가는 가정 분열을 보게 된다고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다.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눅 12:51~53)는 말씀의 현실이 된다고 한다. 부모세대가 ‘북한이…’를 꺼내면, 자녀세대는 국정원이 자신의 사생활을 다 들여다본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나라가 없으면 우리도 없다’고 하면, ‘모든 것이 대통령 탓’이라 한다. 접촉점이 없어진다.

우리나라 정치판에 정치도의(政治道義)가 있을까? 바른 윤리가 존재할까? 한마디로 없다. 왜? 철저히 계산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는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정치를 생물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밥그릇 싸움만을 하고 있는 한, 정치는 죽은 정치이다. 이합집산(離合集散), 이전투구(泥田鬪狗),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뒷자리에 먹을 것 쟁탈전이 있음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정치판의 이면(裏面)에는 음모, 모함, 비난, 죽이기 등 어둠과 죽임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최근 미국 드라마 ‘House of cards’는 미국 대통령 선거와 집권을 위한 권모술수(權謀術數)의 추악한 민얼굴을 주제로 삼아 시청률이 높다고 한다. 우리의 정치판도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이런 정치는 결코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정치의 밥그릇 싸움에 숟가락을 올리려고 애쓰는 이들이 많다. 한 마디로 타락이다. 교회의 예언자의 외침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다. 세상을 살리는 역할도 밥그릇에 숟가락을 올리는 순간 없어진다. 죽은 것과 접목하게 되면, 교회 역시 죽는다. 정치판에는 교회의 자리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한 정당의 ‘제5중대’ 소리를 듣게 하는 한, 교회는 죽은 교회에 불과하다.

부활의 아침이 밝았다. 교회가 복음 위에 세워져야, 죽은 정치도 부활 할 길을 얻게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