넴루드 산 위의 안티오쿠스 돌 무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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넴루드 산 위의 안티오쿠스 돌 무덤(39)
  • 승인 2003.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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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천년 해묵은 역사의 뒤안길을 회상의 나래를 활짝 펴서 이곳 저곳을 헤집고 다니다 엄연한 현실의 원점으로 되돌아 왔을 때 우르파(Urfa)행 리무진 버스는 반 호수의 끝자락을 거의 되돌아 나와 넴루드(Nemrut) 산허리를 끼고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굳이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공간과 시간이 하나임은 옛 현장의 자취를 직접 밟아본 자만이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경험적 원리일 것이다.

역사는 시간이면서도 공간이다. 역사가 과거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라면, 일어났다는 것은 곧 시간을 뜻하며 일은 공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어떤 시간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을 다루는 역사는 한낱 쓸모없는 화석과 같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는 현재의 생명력 그 자체이다.

이번 성지 순례의 최대 관심은 갈대아 우르의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거대한 구속사의 산줄기를 따라 흔연히 걸어갔던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새로운 시공간적 의미로 조명해 보려는데 있었다.

말하자면 신구약 성경의 알파와 오메가를 관통하는 어떤 신비로운 힘의 실체를 학문적인 추측으로서가 아니라 눈과 가슴으로 직접 보고 경험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갑자기 집채만한 큰 넴루드 바위산(2,935m)이 눈앞을 꽉 채우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넴루드 산,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산이 남쪽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있는데, 그 산 정상에는 전설같은 사연들이 묻혀져 있다.

이곳은 유프라테스강 상류지역인데다가 화산재가 풍화작용을 일으켜 형성된 비옥한 토양으로 뒤덮여져 있어서 울창한 수풀림을 이룰만도 하지만, 산 전체가 변변한 나무 하나없는 민둥산이 되어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자 언뜻 한 줄기의 엷은 생각이 머리 속을 재빠르게 스쳐갔다. 이 비옥한 땅을 사이에 두고 강대국들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쟁탈전은 결국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는 불모의 땅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넴루드가 “세상의 처음 영걸"이요 “하나님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창 10:8’9)이었다는 성경의 그 니므롯(Nimrod)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니므롯 땅이 앗수르에 인접해 있고 바벨론 지역의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형태로든지 넴루드와 연관성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넴루드가 역사의 지평에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로마 군대가 가나안 땅에 첫 발을 들여놓기 40여 년 전이었다. 그 때 아나톨리아 지역에는 코마게네라는 작은 왕국이 가녀린 생존의 숨을 내쉬면서 나라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이 왕국은 비록 짧은 기간(B.C. 69~A.D. 72)이기는 했지만 이란을 중심으로 한 고대 파르티아 왕국과 로마 군단이 대치하고 있는 살벌한 전선의 공백지대에 있으면서 동서양의 문명과 사상을 조화있게 교류시키는 중개 국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코마게네는 이웃 파르티아와 연합하여 로마제국의 막강한 세력에 맞서서 집요하게 반로마 투쟁을 벌였으나 로마의 거센 폭풍우 앞에서 잠시 환하게 타올랐던 역사의 불꽃은 소리없이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강대국의 세력 판도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냉혹한 고대 국가 생존 법칙이 빚어낸 서글픈 결과이기도 하였다. 코마게네 왕가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2세기 소아시아의 안디옥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알렉산더의 후계국가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후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더욱이 코마게네 왕국의 문화적 성격은 페르시아(파사)적인 바탕에 헬라적 요소가 가미된 혼합 문화였다는 점이 점차로 명확해지고 있다.

당시 소아시아의 수많은 군소 국가들이 로마의 점령과 함께 역사 무대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코마게네는 인간의 눈을 의심케하는 불가사이한 고대 문명을 험준한 산 정상에 남겨 놓음으로써 세계사의 한 페이지에 그 존재의 역사성을 뚜렷이 각인시켜 주었다.

넴루드 산 정상은 마치 경주 부근에 있는 엄청난 크기의 신라 왕릉을 연상시킬 만큼 산 그 자체가 둥근 무덤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 무덤의 지하에는 코마게네 왕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던 안티오쿠스 1세의 시신이 묻혀있다. 소아시아 전역에서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크기(높이 60m, 직경)의 이 왕릉은 산 정상에서 하늘로 향하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인 형태로 되어있다.

그것은 곧 하늘과 가장 가까이 접근함으로써 왕 자신이 다시 신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무덤 밑자락으로 내려가면 동쪽과 서쪽에 돌을 깎아 만든 성벽과 신전 테라스가 있고, 그 안에는 8~10m 높이의 아폴로, 행운의 여신 티케, 제우스와 헤라클레스 등의 석상들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그 곁에 코마게네 왕국의 최고 통치자였던 안티오코스의 석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것은 지상의 왕들이 죽어서도 최고의 신 반열에 속하게 됨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강대국의 침략을 빈번히 받았던 약소 국가 코마게네, 헛된 내세의 소망을 안고 죽은 한 인간의 시신을 묻기 위해 첩첩이 쌓아올려진 60여만 톤의 돌들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눈물과 피 맺힌 사연이 가슴 아리게 베어져 있는 듯 하였다.

혼자 천국에 가겠노라고 자신의 모습을 돌에 새겨서 높은 산 위에 세우게 했던 피의 독재자 안티오쿠스는 유프라데스 강가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과 고산지대의 혹독한 추위에 깨어지고 빛 바랜 흉칙한 몰골의 석상으로 덧없이 흘러간 2천년 세월의 허황된 역사를 소리없이 증언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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