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설픈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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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설픈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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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1.10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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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한 목사·대한기독교서회 사장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만일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위한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신다면, 뭐라 대답할까? 선뜻 답하기 어렵다.

백범 김구 선생은, 하나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신다면,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 하겠다고 했다. 그다음 소원을 물어도, 또 그다음 소원을 물어도,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 하고 대답하겠다고 했다([나의 소원]). 그의 소원은 간절했다. 그런 백범을 비명(非命)에 보낸 것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다.

그런데 백범과 달리 “한국교회를 위한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왜 선뜻 답하지 못하는가? 첫째는 내게 한국교회를 향한 그토록 간절한 소원이 있는가 하는 아픈 자성 때문이고, 둘째는 한국교회를 위해서 빌어야 할 소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10%대에 머물고, 교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확대, 심화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교회의 참회와 개혁만 아니라, 사랑의 회복과 실천, 교회의 연합과 일치, 사회봉사와 예언자적 역할, 공공성의 회복과 사회적 신뢰 회복 모두 다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그래도 한 가지를 말하라고 다그치시면, 뭐라 해야 하나? 나는 망설이다가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덕(德)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급한 현실에서 ‘덕’이라니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힐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에는 ‘덕스럽게 은혜롭게 처리하자’는 말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사실 그 말은 엄연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시시비비를 따지지 말고 두루뭉수리로 넘어가자는 강요였고, 때론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분들의 과오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라는 압력이었다. 그것은 사이비 ‘덕’이다.

그러니 ‘덕’이 넘치는 한국교회에 도리어 갈등과 대립이 넘쳐나는 것이다. 총회가 결의해도 따르지 않고, 소송에 패해도 불복하여 맞서고, 끝내 갈라선다. 교단의 난립은 그 증거다. 한국교회에서 참된 의미의 ‘덕’은 ‘멸종위기종’이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게 되었다.

‘덕’은 처음 교회에서부터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서신서에서 ‘덕’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그 중요도를 알게 된다. ‘덕’이란 분쟁을 멈추고 화평을 이루는 것이다. 공동체의 화목을 위해서 손익계산을 넘어서는 것이다. ‘덕’을 세운다고 할 때, 그 기준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이다. 그 목표는 사람의 승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이것이 서신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논점이다.

이것은 교회 밖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요즘 교회는 교과서 국정화 문제나, 퀴어축제, 성소수자 문제, 종교간의 차별 문제 등에 대해 날을 세우고 연일 목소리를 높인다. 시위도 하고 방해 집회도 하고, 국회의원 낙선 운동도 하겠다고 한다.

신앙에 어긋나는 현실이나 정책에 대해 교회는 당연히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그 태도는 덕스러워야 한다. 시쳇말로 품격이 있어야 한다. 비판하되 ‘덕’을 이루기 위한 비판이어야 하고, 비판하되 그 대상에 ‘나’도 포함한 비판이어야 한다.

교회가 덕이 있어서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다면, 조용히 반대 입장을 밝혀도 세상이 주목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안 된다면 토론하고 설득하고, 대안을 찾으려 노력하면 될 것이다. 큰소리로 격하게 반대하는 것은 그만큼 교회의 대사회적 설득력이 떨어져 있다는 반증일 것이며, 세상은 교회의 치부를 가리키며 ‘너나 잘하라’고 되받아칠 것이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되새기며, ‘참된 덕을 세우는 한국교회’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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