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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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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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0.0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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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기 목사 / 예수로교회

사람이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면 의관이 바른지를 알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나라의 흥망성쇠의 도리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잘잘못을 알 수 있는 법이다.

당나라는 위징의 충언과 태종의 경청으로 정관의 치(貞觀之治)를 이루어 태평성대를 누렸다.

모름지기 지도자가 조신해야할 처사는 자신을 살펴 주위를 간검하고 인(人)의 장막(帳幕)을 경계해야한다. 푸코(Michel Foucault)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변화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치의 핵심은 천심을 얻어 민심을 살피는 일이다. 조직화된 세력의 등에 올라타 흥정을 하거나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무모함이 아니다. 침묵하기에 들리지 않지만 높은 불만 속에 현실을 주시하는 풀뿌리 민초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정치의 덕목이고 목회의 저변이다.
생각이 다른 건 자연스럽다. 생각이 모두 같다면 오히려 위험할 터다. 하지만 같은 걸 비껴 보는 건 사시(斜視)고 사심(私心)이다. 눈에 비늘이 벗겨져야 한다.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꽃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아름답게 보이는 위치에 서라.

20세기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지압장군의 승리의 비결은 3불(三不)전략이었다. 북한이 구사하는 모든 전략들이 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니 염두에 두고 볼 일이다.

라파엘로(Raffaello Sanzio)의 ‘아테네 학당’을 보면 플라톤은 오른쪽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펴서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다. 플라톤의 손에 들린 책은 우주의 발생 신화를 담은 ‘티마이오스’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에 들린 책은 인간이 이 지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이집트인들은 단 한 사람의 내세를 위해서 불가사의한 공사로 피라미드를 쌓았지만, 로마인들은 많은 사람의 현세를 위해서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자재로 위대한 로마의 길을 닦았다.

신앙생활은 말과 생각이 아니라 인격의 변화요 삶의 성화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사람이다. 사람을 키우고 세워야 다음세대가 바로 선다.(삿2:10)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이론이나 구호가 아니고 말씀 안에서 빚어지는 성화의 삶이다.(being in becoming) 십자가는 주검이 머무는 무덤이 아니라 부활 승리의 성소다. 참된 순교는 죽기를 원함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한 십자가의 삶이다.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마지막이 아니라 그토록 말씀을 살아냈던 세상을 이긴 삶의 내력들이다.

삶이 없는 복음은 허구다. 성화 없는 구원은 외식이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무기력하다. 오늘도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억울하고 비참한 아벨의 죽음들이 즐비하다. 정작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그들이 살고자 했던 세상을 헤아리지 않는 삶이 어찌 온전하다 하겠는가. 희망의 처소는 가파른 삶이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고 가파른 십자가의 능선을 함께 넘어야 한다. 말끔한 대리석과 푹신한 양탄자 위에 재림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피와 땀과 눈물의 능선을 넘지 아니하고 혀로만 설교하는 미소를 대중들은 신뢰하지 않는다.

걸레는 깨끗해야 더러움을 훔친다. 연탄은 밑에서 불씨를 집힌다.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예수님은 걸레처럼 우리의 죄악을 보혈로 훔쳐 주셨다. 연탄처럼 하얗게 세상에 생명의 불씨가 되어 주셨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삶의 거울이 되어주셨다. 주님은 지금 가을 타작마당에 한국교회를 올려놓으셨다.(마3;12)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놓으시고 벌판에 바람을 놓아주소서.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시가 생각난다. 움켜 쥔 추수 단에서 이삭을 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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