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그리고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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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그리고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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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9.1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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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익 목사 / 신촌성결교회

사람의 삶에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필요하지만 그중에서도 더 소중한 요소는 평화와 화평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화평이 무엇인가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다. 진정한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 될 때 주어지는 화평이다. 그것이 영적인 화평인 에이레네의 화평이다. 그 화평이 이루어질 때 자신과의 화평도 이룰 수 있고 이웃과의 화평도 이룰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화평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누군가의 수고와 제물됨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화평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이 세상에서의 화평이나 평화도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화평이나 평화는 반드시 제물을 먹어야 만들어지고 조성된다.

우리는 지금 시리아의 난민들을 보고 있다. 참 처참하다. 흡사 우리나라의 65년전 6,25때 피난가는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우리 조상들의 피난행렬이 그랬을 것이다. 평화를 잃으면 그렇게 된다. 시리아는 5년째 내전중이다. 알 아사드 독재자 때문에 온 나라 국민들이 평화를 잃은채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므로 촉발된 내전에는 마침내 독까스까지 등장했다. 거기에 IS 즉 이슬람국가까지 출현하여 인명을 무자비하게 살상하고 있다. 2013년에 9만명이 희생되었고 2014년에는 19만 천명이 사망하고 지금까지 22만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구 2,300만명 중에 1,160만명이 피난길에 나섰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영접하는 곳 없이 거절당하고 그들이 올까봐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갈곳이 없다. 이미 평안을 잃었다. 화평도 잃었다. 삶의 질서도 송두리채 잃어버렸다.  사람에게 내일이 없고 매일을 불안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유럽의 나라들이 그 장벽을 헐고 난민들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왜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였는가. 터키 해변에서 시리아 난민 세살박이 아이 아일란 쿠르디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바닷물에 떠 내려온 아이의 시체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세상은 갑자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자성하고 회개하고 난민들을 받아들이겠다고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독일이 3만명을, 영국이 24,000명을, EU가 120만명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핀란드 갑부 총리는 난민들에게 자기 집을 내놓겠다고 했고 이집트 통신재벌 나구이브 시위리스라는 사람은 지중해에 있는 섬중 하나를 사들여서 난민들을 수용하는 난민나라를 건설하겠다고 나섰다. 난민들은 이제야 미완성이지만 평화와 안정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반전이 이루어졌는가. 그것은 세 살난 한 아이의 죽음 때문이다. 그 아이가 십자가를 진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화평이다. 평화이다. 그 화평이 영적이든 환경적이든 내면적이든 관계적인 화평이든지 화평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에게 이 화평을 주시기 위함이다.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에이레네의 화평이다. 내 내면을 천국화 하는 화평이고 이웃과 관계를 정상화 하는 화평이고 현재 내 삶의 현장에 천국화를 이루는 화평이다. 이 화평은 너를 향한 너그러움이고 나를 향한 넉넉함과 성숙이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자질이다. 우리는 이 화평을 잘 간직하고 누려야 한다. 상실하지 말고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아니면 또 누군가가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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