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교단의 역사(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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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교단의 역사(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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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1.0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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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측, 오늘날 한국교회 중심교단으로 우뚝
▲ 조병하 교수

1970년대 한국교회의 대형집회들(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74년 한국대학생선교회 주최 엑스플로 74)로 한국교회에 개인구원과 전도의 사명이 강조됐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역사적인 배경에서 대한신학교를 졸업한 장종현 설립자는 독자적으로 1976년 11월 1일 대한복음신학교를 통신과정으로 시작하게 됐고, 대한복음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이 교회를 세우면서 1978년 9월 처음으로 졸업한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교단을 설립하게 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교단발전은 신학교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해 왔다. 그간 지속적으로 발전해 와 오늘에 이른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는 2014년 10월 현재 전국 95개 노회(해외 4개 노회) 5300여 교회 87만 성도, 선교사 430여명 파송, 군선교교역자 40여명, 군목 2명, 군목후보생 4명으로 한국장로교에서 세 번째, 모든 교파를 포함해서 한국교회에서 네 번째 교단으로 성장했다.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기에 형성되어 발전해 온 백석측은 오늘날 한국교회 중심교단으로서 분열된 한국교회를 치유하는 교단연합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올 해로 교단 창립 38년차를 맞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는 교단설립이 있은 후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초창기 7-8년의 역사를 구성하기 위한 자료의 부족을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시 교계신문들이 초창기 역사 구성에 도움을 주고 있고, 총회자료는 1982년 9월 23-24일에 있었던 총회부터 발행된 “총회촬요”들이 있고, 2005년에 집필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정통) 총회역사(1978-2002)’과 김덕환의 ‘한국교회교단형성사(중)’ 등이 있어서 이를 참조하여 다음과 같이 초창기 총회의 역사를 구성할 수 있다. 1976년 11월 1일부터 1980년 5월까지를 교단 배태기, 1980년 5월부터 1981년 12월 29일까지를 독노회총회시기, 1981년 12월 29월부터 1982년 12월 27일까지 교단통합과 명칭 확정기, 그리고 이어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총회)의 발전기로 접어들었다.


백석교단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복음을 받아들여 이루어져 오랜 역사를 지닌 교단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미 있었던 교단의 분열에 의하여 생겨난 교단도 아니다. 1970년대 중반 놀랍게 한국교회가 성장하면서 기존 교단과 당시의 신학교육기관들이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들의 수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에 복음전도에 사명을 가진 설립자 장종현에 의하여 시작된 대한복음신학교가 세워졌고 한국교회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는 역할을 감당해 오고 있다. 신학교를 세워 지도자를 양성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출신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교단이 형성되어 발전하게 됐다.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었던 초대교회 때는 그리스도교가 안정되고 제도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하는데 2세기나 필요했다. 1907년 독노회를 구성하였던 한국장로교회는 1912년에 이르러서야 총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알렌과 1885년 아펜젤러, 언더우스에 의하여 시작된 한국교회는 20년을 경과하여 독노회를 구성하였고, 다시 5년이 경과한 후에야 총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석교단의 태동기에는 이러한 일들을 1-2년 사이에 모두 이루어야 했다.


1978년 9월에 결성된 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복음)로 이름 지었고, 1대 총회장으로 장종현 목사, 총무에 허광재 목사, 서기에 이상민 목사를 총회임원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이 때 교단선언문도 만들어 일시적으로 합류했던 합동 비주류측에서 다시 나오면서 이를 교계신문에 공포했다. 백석교단이 생겨났던 해인 1978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에서부터 분열의 위기를 보이기 시작했고, 1979년 대구동부교회에서 모였던 제64회 총회에서는 주류와 비주류로 분열하게 됐다. 당시 다수를 이루고 있던 비주류의 분리과정에서 인근 방배동 영광교회에 소재했던 합동 비주류측 ‘총회신학교’에서 설립자를 비롯해 허광재, 이상렬, 성상기 등이 편목과정을 밟았다. 설립자는 당시 교장이었던 박아론과 장로 한 사람의 권면으로 1979년 봄학기 편목과정으로 입학하여 1980년 2월 목회학석사(Th.M.)를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대한복음신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평북-함북노회 직영) 신학교로 비주류측과 연관을 갖기도 했다.


1980년 1월 총회실행위원회의 판단과 2월 총회신학교의 이사회의 해임결의를 거쳐 3월 1일 박아론학장이 해임되었고, 이 일로 합동 비주류측이 다시 방배측과 종암측으로 분열되게 되는데, 이들이 분열하기 전에, 비주류측에 합류하여 6개월이 채 경과하지 않았던 복음총회(백석)측은 이러한 분열을 감지하고 같은 해 4월경 합동 비주류측에서 나와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들은 백석측 교단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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