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주기도문, 재번역(안) 보다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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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주기도문, 재번역(안) 보다 훨씬 낫다
  • 승인 2003.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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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기도문이라는 것 이외에 연령층이나 학식, 신분 여하에 관계없이 누구나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외우게 되는 성경 구절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한국 교회의 주기도문은 거의 1백여 년 동안 약간의 수정된 부분(두번째 기원)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번에 주기도문의 재번역을 역설하는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잘못된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은 하나님과 세계 교회 앞에 큰 수치이며 하루 속히 재번역되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사용하고 있는 현행 주기도문이 재번역된 초안의 내용보다 훨씬 더 원문의 의미에 가깝다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하는 것인가, 용서하는 것인가?
현행 주기도문과 수정된 주기도문을 비교해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사람)를 사하여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용서하여) 주옵시고’로 되어 있다.

아마도 ‘죄 지은 자’를 ‘죄 지은 사람’으로 고친 것은 그것이 낮춤어의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원래 자(者)라는 단어는 높임어의 일종이며, 명사와 합쳐져 ‘능통한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낸다(예, 왕자, 학자, 지도자, 사자 등). 따라서 그런 이유 때문에 ‘죄 지은 사람’이라고 고칠 필요는 없다.

그 다음으로 재번역은 ‘사한다’는 말을 ‘용서’한다는 말로 고치고 있다. 아마도 ‘사한다’는 표현이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고유적인 죄 사함의 의미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사하다’를 ‘죄인을 용서하여 놓아준다’, 그리고 용서를 ‘죄를 면해 주거나 놓아 줌’의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말하자면 사전적인 의미로는 ‘사하다’와 ‘용서하다’가 전혀 구분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으며(막 2:5~7) 인간 편에서는 상대방이 나에게 지은 죄를 덮어두거나 벌하지 않을 뿐이다(마 18:35).

원문에서 ‘사하다’는 단어는 두 개의 시상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주동사 ‘아페스’(제 2부정과거 명령법)는 ‘사하여 주시옵소서’, 뒤에 나오는 ‘아페카멘’(재 2 부정과거 직설법)은 ‘사하여 주었다’를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두 동사는 모두 동일한 어근(‘아피에미’)에서 비롯되고 있는데, 이 ‘아피에미’라는 동사는 주로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주시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다(마 9:2, 12:31, 눅 23:34, 롬 4:7, 요일 1:9, 2:12 등).

그리고 사한다는 말은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보편적인 용어가 되어 있다. 따라서 ‘사한다’는 표현이 하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는 고유적인 용어라든지 혹은 익숙치 못한 특별한 신학 용어라는 이유 때문에 ‘용서’라는 말로 바꿔 번역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로부터 사죄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남의 죄를 사해 주었거나 혹은 우리들에게 사함 받을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 없으신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자유로운 선물일 뿐이다. 요컨대 다섯번째 기원은 현행 주기도문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험과 유혹의 차이점
이번 재번역에서 수정된 부분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빠지지 않게 하시고), 다만(생략) 악에서 구하옵소서(구하소서)’이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로 고친 것은 하나님이 시험의 원인을 제공하시는 분이라는 인상을 피하고 우리가 그 주체적인 행위자임을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험(‘페이라스몬’)을‘유혹’(tempt-ation, 공동번역, 새번역, 천주교)으로 번역하자고 주장하는 것에는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시험이라는 말에는 시험(test)이라는 긍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시험이라는 말이 유혹, 시련 등과 비슷한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받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예-욥, 예수님) 성도들로 하여금 금과 같이 연관된 믿음을 가지게 하신다.

시험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 편에서 볼 때에는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라고 기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꼭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라면 예수님처럼 ‘성령에게 이끌리거나’(마 4:1) 혹은 ‘성령이 광야로 몰아 내시듯이’(막 1:12) 우리들이 비슷한 시험을 받는 것을 허용하실 것이다.

이번에 재번역은 ‘다만’이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원문 ‘알라’에 그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강한 반의적 접속사인 ‘알라’는 특별히 앞 문장보다는 뒷문장의 의미에 강조점을 두려고 할 때 사용되고 있다. 본문에서는 ‘메 ~알라’(not ~ but)의 구문으로 되어 있는데, 직역하면 ‘시험에 들어가지 않게 하옵시고, 그러나 악(혹은 악한 자)으로부터 구해 주옵소서’가 된다. 필자는 앞의 소극적 기원과 뒤의 적극적 기원을 가장 적절하게 연결시켜 줄 수 있는 한국말은 ‘다만’이라고 생각한다.

국어사전들은 ‘다만’의 의미를 ‘앞말을 받아 이와 반대되는 말을 할 때에 말머리에 쓴 말’(표준 국어 사전, 이숭녕, p.268)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다만’이라는 말은 생략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써야만 할 접속사다.

마지막 송영의 문제
주기도문의 송영은 권위있는 고대 사본들(시내산 사보, B, D)과 누가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5세기 이후의 후대 사본들(K, L, W)과 번역서들(Coptic, Sahidic, Syriac)에는 나와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후대 기독 교회가 유대인의 기도관습에 따라 기도 끝의 송영으로 삽입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거나(Origen, Augustine) 본문을 그대로 보존해야만 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Calvin, Bengel).

현행 주기도문은 송영은 ‘대개’(大槪, 大蓋)로 시작하고 있다, 아마도 이 말은 중국어 蓋(카이, ‘아마’, ‘혹은’)로 시작하는 중국어 성경에서 중역된 것 같이 보여지는데, ‘대략’, ‘대강’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개’라는 말은 원문의 의미와는 전혀 동떨어진 번역인데, 이에 해당되는 ‘호티’는 ‘왜냐하면’, ‘때문이다’의 의미가 있다(영어의 because보다는 약한 for에 해당). 즉, 이상의 모든 간구를 드리게 되는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당신)에게 영원히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재번역이 현행 주기도문보다는 원문에 훨씬 더 가까운 번역을 하고 있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여기에서 ‘권세’를 ‘권능’으로 번역한 것은 매우 잘된 번역이다. 왜냐하면 ‘뒤나미스’에는 ‘권세’라는 뜻보다는 ‘능력’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현행 주기도문의 송영은 ‘나라와 영광이 단지 아버지에게 있다’라고 소극적인 고백의 형식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에 비해 재번역은 ‘당신(아버지)의 것이옵니다’라고 번역함으로써 그것들이 아버지의 고유적인 권리임을 적극적으로 고백케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는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아버지)의 것임이니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맺는 말
이상에서 논한 주기도문의 재번역 문제에 대해 몇가지 사실들을 지적해두고 싶다.

첫째, 성경 원문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주기도문의 내용대로 정확하게 기도하려면 한 때 천주교 사제들이 라틴어로 기도문을 외웠듯이 헬라어 원문 그대로 암송해야만 할 것이다.

이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어떤 언어로 가르치셨는가와 누가 복음 11장의 주기도문과의 상관 관계 등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져야만 할 것이다.

둘째, 현행 주기도문에서 반드시 수정하지 않아도 될 부분은 그대로 남겨두고 잘못된 번역만을 수정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현행 주기도문이 수정된 재번역보다는 훨씬 더 원문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만일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재번역하려고 하면 먼저 이 부분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신학자들의 폭넓은 견해를 수렴해야만 할 것이다. 만일 어느 한 교단 위주로 이 번역이 추진된다면 한국교회는 겉잡을 수 없는 혼선을 빚게 될 것이고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만을 관철시키기 위해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키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얼마나 정확한 주기도문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느냐 보다는 어떤 마음의 자세와 믿음의 태도로 드리느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영민교수·천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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