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는 회개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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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는 회개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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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1.2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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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 이경직 교수
파라오가 하나님 말씀에 거듭 불순종할 때 이집트에 가해지는 재앙의 강도는 커져만 갔다. 파라오 앞에서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었지만 그 뱀에 물려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나일 강이 피로 바뀌는 첫 번째 재앙에서 이집트 사람들은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두 번째 재앙에서 개구리들이 나일 강으로부터 땅 위로 올라왔을 때 이집트 사람들은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세 번째 재앙에서 티끌이 이로 바뀌었을 때 사람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 네 번째 재앙인 파리들이 이집트를 덮었을 때 그 이전까지 안전했던 대기마저 위험한 장소가 되었다. 다섯 번째 재앙에서는 그 동안 다치지 않았던 ‘들에 있는’ 짐승들이 죽게 되었다.

불순종이 커질수록 하나님의 징계도 커져만 간다. 파라오의 불순종 때문에 ‘들에서’ 죽어야 했던 짐승 중에는 나귀와 낙타, 소, 양이 있었다. 나귀는 짐을 나르는데 유용하게 사용된 짐승이었다. 낙타는 물이 없는 사막에서 이동할 때 꼭 있어야 하는 운송수단이었다. 그러하기에 낙타는 이집트의 상업이 번영하도록 하는 기반이 되는 짐승이었다. 소는 나일 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에서 쟁기를 끌어 농업이 번성하도록 하는데 사용되는 짐승이었다. 그러하기에 그 짐승들은 이집트인들에게 신과 같이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하나님은 그 짐승들을 치심으로써 그들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들을 제거해주신다. 때때로 우리의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그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이집트 사람들을 대표하는 파라오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고난 자체만 보았지 그 고난과 징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섯 번째 재앙을 이집트에 내리실 때 인내를 보이신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가축들 중에서 오직 ‘들에 있는’ 가축들만 돌림병에 걸리게 하시기 때문이다(출 9:3).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들의 집에 있는 가축들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라오는 하나님의 그러한 배려에 대해 감사하기보다 계속 불순종의 태도를 보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은 죽지 않도록 하심으로써 이집트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구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침묵으로 반응한다. 그들은 출애굽 이후에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불평한 백성이다. 은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고난에 대해서는 불평하는 것이 우리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섯 번째 재앙을 즉시 행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출 9:5)고 기한을 정하여 말씀하셨다. 모세로부터 이 말을 전해들은 파라오에게는 회개하고 돌이킬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파라오는 그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파라오는 개구리 재앙을 겪었을 때 개구리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내일’ 개구리들이 떠나가게 해달라고 요구했다(출 8:10). 혹시 그 사이에 하나님의 개입 없이 개구리들이 저절로 없어질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파라오가 요구한 ‘내일’이라는 시한을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파리 재앙이 일어났을 때도 모세는 파리 떼가 ‘내일’ 이집트를 떠나도록 하나님께 기도한다(출 8:29). 다섯 번째 재앙에서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내일’이라는 시한을 직접 주신다.

파라오가 ‘내일’이라는 시한을 하나님의 일하심을 부정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던 반면에, 하나님은 ‘내일’이라는 시한을 파라오의 회개를 위한 자비의 시간으로 삼으신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롬 9:22). 그리스도께서도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바울에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셨다”(딤전 1:16). 이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세상을 향하여 보여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것이다(벧후 3:15).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에 대해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3:9). 우리 그리스도인도 모든 사람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오래 참아야 한다(살전 5:14).

세상이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세상의 죄와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커져만 간다. 그러나 최종적인 심판이 오기 전까지 그 징계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3:4). 우리에게 주어진 ‘내일’이라는 시한을 감사하게 여기며 매일 회개의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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