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 교회는 신앙을 결합시켜 항일조직의 역할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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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교회는 신앙을 결합시켜 항일조직의 역할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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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1.1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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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하의 한국교회 IV (신사참배와 배교의 문제)

일제 강점기가 계속되면서, 1930년 세계 공항의 여파와 함께 일본의 전쟁의 확대를 불러오게 됐다. 1931년 만주를 침략했고, 1932년에는 상하이를 침략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대한제국(조선)을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일제의 계속되는 침략정책은 1941년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발발하게 했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유럽세력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동아공화국건설을 표방했다. 결과로 민족의 독자성을 말살했고, 황국신민화 정책과 천황숭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창씨개명을 강요, 경제를 수탈하고, 국방헌금을 강제 징수, 일본어 상용화를 추구했다.

일제의 강압적인 정책의 변화에 그리스도교도들은 항일 민족운동과 민족문화 수호운동으로 답했다. 1920년부터 1938년까지 연희전문 국문학교수 최현배(1894-1970)는 1930년 ‘우리말 말수 사용의 찾기’를 조사했고, 1937년에 ‘우리말본’을 출판하였다. 사립학교에서 가르치며 기독신보 주간을 맡았던 이윤재(감리교신학 교수), 그밖에도 장지영 등은 국어수호에 힘을 쏟았고, 민족주의 사관으로 ‘동사략(東史略)’을 집필하였던 남궁억, 그리스도교인의 사관으로 한국의 역사를 고난 역사로 집필하였던 함석헌 등은 국사수호에 힘을 다했다. 식자층을 비롯한 일부 기득권자들의 친일행위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여전히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일제 말 교회는 복음에 의한 민족의 각성과 신앙을 결합시켜 거대한 항일조직의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서는 신사참배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일제는 1935년경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신도는 중국에서 6세기에 발생하여 9세기에 의식화된 일본의 민족종교이다. 17-18세기 일본 유학자 중심으로 복고신도를 주창함으로써 명치유신시기(1853-1877)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본래 신사는 일본 조상신, 국조신, 전쟁신, 무사신, 영웅신을 모시는 사당이었는데 후에 천황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현인신(現人神)으로 숭배하면서 충성과 존경을 나타내는 종교행위로 등장하였다. 일제는 일본 창세신화에 나오는 주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높다고 고백하기를 강요하였다. 그러면서도 회유를 위하여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조상과 선열에 경의를 표하는 국민의례라고 가르쳤다.

1935년 11월 14일 평양 그리스도교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으로 폐교를 위협하였고, 그리스도교도의 학교로부터 선교사들을 배제시켰다. 일본정부의 간책으로 로마 교황청 역시 신사참배가 단지 애국심과 충성심을 표현하는 국가의식이라고 인정하였다. 신사참배를 강요당한 교회와 선교부는 일치 단합하여 대응하지 못하였다. 1915년부터 전주에서 신사참배를 실시하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감리교는 국민의례로 받아들여 1936년 10월 8일자 ‘매일신보’에 서울의 신자들과 학생 7천여명이 조선신궁을 참배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장로교는 1931년 경남노회에서 반대하고, 1932년 제21회 평양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금지하는 결의를 하였고, 1936년에는 학교폐쇄를 결의했다. 그러나 1938년 6월 9일자 ‘매일신보’에는 전북노회가 첫 희생이 됐다고 보도됐고, 실제로 총회 때까지는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굴복하게 됐다. 1938년 9월 9일 제27회 총회에서 경관 97명이 동원되어 위협하는 가운데 193명의 총대들이 평양 ‘서문밖교회’에 모여, 다음 날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는 국민의 의무이다.’는 동의에 반대도 묻지 않고 가결했다. 강경파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은 구속됐고 총칼의 위협 아래 친일목사들을 동원하여 분리공작을 수행케 하여 가결을 이루어냈던 것이었다. 1938년 12월 12일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의 일본신궁참배단이 출발했다.

주기철 목사는 네 차례에 걸쳐 구속됐고, 7년 옥고 끝에 순교했다. 산정현교회는 폐쇄됐다. 의사였던 박관준과 보성여학교 음악선생이었던 안이숙은 신사참배 강요를 금지시키려고 노력했고, 1938년 주남선과 한상동은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벌렸다. 한상동은 신사참배 노회는 폐쇄하고 신사참배 반대노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하고 신사참배 목사에게 수세와 수찬을 거부하자고 주장하다가 같은 해 7월에 구속됐다. 주남선은 1938년 거창읍교회를 사임하고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수차례 검속되어 1940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 밖에도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운동을 수 없이 열거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의 결과는 2,000여명이 투옥되었고, 200여교회가 폐쇄 되었으며, 50여명의 순교자들을 내었다.

성결교회는 역시 총회에서 결의한 후에도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가르치는 재림의 교리가 천황의 존엄을 침해하고 국체를 위반하는 사상이라고 탄압하여 1943년 5월 24일 교단이 강제해산 당하였고 교역자 장로 집사 등 300여명이 구금되었고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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