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도의 신비주의와 김교신의 모교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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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의 신비주의와 김교신의 모교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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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1.04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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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하의 한국교회 III (한국 그리스도교의 분파운동)

한국 그리스도교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을 중심으로 보편교회로 성장해 가는 동안, 세계교회사에서 보이듯이, 독특한 분파운동들이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하였다. 일제하에서 가장 특징이 있었던 분파운동들로 이용도(1901-1933)의 신비주의 운동과 김교신(1901-1945)의 무교회주의 운동을 들 수 있다.

감리교 목사 이용도는 장로교회의 김익두, 길선주 목사와 함께 삼대 부흥사 중 하나였다. 이용도는 개성 한영서원(송도교보의 전신)에 다니던 중학교 때 삼일운동에 참가하여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수학 중 폐병 3기로 평남 당동의 이환신 목사 집에서 치료차 기거하며 부흥회를 인도하는 동안 신앙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1928년 강원도 통천교회에 부임한 후 12월 24일 새벽기도에서 그리스도와 합일을 추구하였다.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나의 혼을 빼버리소서 그리고 예수에게 아주 미쳐버릴 혼을 부어주소서! ....예수께 미쳐야 하겠나이다. ...”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중에 “생전 보지 못하던 무서운 마귀가 나타났다.” 이 때 그는 필사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사탄과 치열한 싸움을 싸웠다. 그 밖에도 그는 환상들을 보았다. 그 후에 그가 말씀을 전하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이용도는 1931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감리교 순회부흥사로 임명 되었다. 그는 교파를 초월하여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평양 장대현교회에서도 인도했다. 1930년도 3월경에 평양에서 인도한 부흥의 결과로 평양기도단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1931년 8월경에 그의 부흥회는 장로교 측이 권징으로 제동을 걸므로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당시 황해노회는 재령교회를 훼방하고 빈번한 여신도들과의 서신왕래, 불을 끄고 기도, 교역자들 공격 등의 문제들과 성서조선 잡지를 선전하여 무교회주의자라고 정죄하고 금족령을 내렸다.

이용도는 1932년 제22차 장로교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같은 해 4월 7일에 있었던 평안노회에서 채필근, 남궁혁의 제안으로 기도제한법이 통과되어 타교파 강사 초청 시에 규정된 수속을 밟을 것과 조용히 기도하고 무인가 단체(평양기도단)를 해산 하도록 하였다. 그는 1933년 감리교에서 휴직처분 받은 후 해주에서 신자들로부터 돌에 맞고 원산에서 치료 중에 지병인 폐병으로 10월 2일 별세하였다.

그는 죽기 얼마 전 친구 이호빈의 권유로 원산에 있는 감리교 “접신녀” 유명화를 찾아가 설교를 듣는 중에 그녀에게 “주여”라며 무릎을 꿇었다. 유명화는 1927년 원산에서 입신체험을 하고 예수가 자신에게 친히 임하셨다고 자신을 예수 모습으로 꾸미고 영흥교회에서 강신극을 행했다. 유명화의 영향 받은 이호빈, 백남주, 한준명, 이용도가 1933년 6월 3일 예수교회를 조직하였다. 이용도는 그들에게 이용당했다.

그 밖에도 군소 이단들이 일어났었다. 일원적 신비주의 혼음교리를 주장하였던 황국주는 100일 동안 기도 후 머리털을 길게 하고 수염도 예수처럼 기르고 꾸미고 목가름과 피가름을 주장하였다. 계성학교 한문선생이었던 이만집은 반선교사 정책을 펴고 자치를 선언하여 조선적인 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변성옥 일파의 ‘조선기독교회’, 송대용의 ‘하나님의 교회’ 등이 보편교회와 달리 이단과 분파교회들을 형성했었다.

또한 일제시대에 이용도만큼 많이 알려졌던 사람은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이었다. 함흥에서 출생한 그는 1920년 6월 일본 유학중 동경에서 노방전도를 받고 결신하고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곳에서 교회분규로 순박한 목사가 교인들의 궤술에 말려 쫓겨나는 것을 보고 비애를 느껴 그해 11월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 7년간 성경강해와 신앙을 배웠다. 1927년 귀국한 그는 함흥여자고등보통학교와 영생, 양정, 송도, 경기보통학교에 재직하였다. 그는 귀국과 동시에 민족의 비운에 통감하여 탄식하였고, 함석헌, 송두용, 유석동, 권인성 등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하였다. 그리고 1930년부터는 ‘성서조선’의 주필로 편집발행을 책임 맡았다.

김교신은 교적이 없어서 어떤 교회에서 교권상의 징계를 받은 일은 없었지만, 1932년 12월에 ‘기독신보’ 사설에 “이사벨의 무리”로 비난 받는 일이 있었다. ‘성서조선’ 창간 후 총독부 검열로 늘 폐간을 각오하였다. 1942년 3월 158호에 이르러 권두언 ‘조와(弔蛙)’의 “혹한에 죽은 개구리는 묻어주고 그 중에도 아직 두어 마리가 살아서 기어 다니니 아직 전멸은 모면했나 보다”는 글귀로 인해 ‘성서조선사건’이 발발하였고 전국 구독자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함석헌, 송두용, 류달영 등 12명과 더불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미결수로 보냈다.

그는 끝내 창시개명을 반대하였고 “성서를 조선에” 주고,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울 것을 주창하였다. 그는 1944년에 투옥되어 감옥에서 발진티부스 감염으로 1945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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