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그리스도교 전래(경교와 로마 가톨릭교회)
상태바
한반도의 그리스도교 전래(경교와 로마 가톨릭교회)
  • 운영자
  • 승인 2014.07.02 17: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785년 봄부터 명동 김범우 집에 모여 예배 드리기 시작
▲ 조병하 교수

최근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의 그리스도교 전래 역사에 대하여 다 각도로 연구하여 기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에 경교의 전래 가능성에 대하여 많은 한국의 교회역사가들이 긍정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당나라 때에 신라(기원전 57년에 시작-라당연합군에 의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676년 통일신라, 918년 왕건에 의하여 고려 시작과 더불어 멸망)와 무역과 문화교류가 활발했던 것을 근거로 그리스도교의 전래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 증거를 찾으려고 많은 시도들을 하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오윤태이다. 그는 1973년에 이미 ‘한국기독교사(한국경교사편)’를 집필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는 정토교이며, 이 정토교가 경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시아에 경교형태로 전래되어 있는 그리스도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근거를 고려 때까지 그는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글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합당한 증거들을 찾을 수 없다. 우리들은 삼국시대 후기와 통일신라시대에 그리스도교가 한반도에 전래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좀 더 문헌적으로나 납득할 만한 방법으로 그러한 주장을 입증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한반도의 삼국시대에는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었다.(고구려 372년, 백제 384년, 신라 458년 전래, 527년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 공인) 그리고 668년 라당연합군은 통일에 기여 했으나 675년 신라군대가 당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676년 통일신라를 이룩한 후 8세기 초에 가서야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한반도에 그리스도교 전래의 역사는 우선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래부터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한반도에 로마 가톨릭교회 신앙이 전래된 것은 선교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선 14대 임금 선조(1564-1608) 이후 북경을 드나드는 사절들을 통하여 들여 온 천주교 서적들을 통해서였다. 물론 로마 가톨릭교회 선교사로 한반도에 제일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은 임진왜란(1592-1598) 당시 고시니 유끼나가(소서행장)가 이끄는 군대의 종군신부로 온 세스페데스의 그레고리우스이었다. 이들에 의하여 일본으로 포로 되어 잡혀갔던 조선인들 중에 로마 가톨리교회 신앙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일본 도쿠가와 시대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로 순교한 자들 중에 조선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소현세자 일행이 청나라 수도 심양관으로 인질로 갔다가 1644년 베이징으로 천도할 때에 함께 가 예수회 신부 아담 샬과 교제하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접하게 되었다.

조선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의 시작은 1777년 정조(1752-1800) 원년에 이벽, 권일신,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등의 남인의 시파 유학자들이 서양학문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1783년 정조 7년 정약전의 매부인 이승훈이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갈 때 이벽이 이승훈에게 천주교의 가르침을 배워 오도록 부탁할 때부터 이다. 이승훈은 베이징에서 신부를 만나 필담으로 교리를 배웠고, 1784년 음력 정월 그믐께 예수회 신부 그라몽의 루이스에게서 세례를 받고 베드로를 세례명으로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수십 종의 교리 서적과 십자가상과 성화, 묵주, 기하학서 등을 가지고 돌아와 신앙생활을 하고 이벽에게 책들(‘천주실록’, ‘7극’ 등)을 전해 주었다. 이벽의 전도로 많은 신자들을 얻어 1785년 봄부터 명동(명례동) 김범우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박해로 김범우는 순교(최초의 순교자?)하였고, 이벽과 이승훈은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이벽은 배교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33세였던 1786년 봄 열병에 걸려 죽었고, 핍박이 시들해지자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박해를 겪고 났던 천주교는 성직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등 여럿을 신부로 선정하여 1789년 베이징 주재 구베아 주교에게 재가 받기를 원했으나 평신도가 행할 수 있는 세례만 허용하고 성직제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1793년 구베아 주교는 서울에 있는 신도들의 요청을 받고 베이징 로마 가톨릭교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주문모 신부를 선정하여 1794년 12월 서울로 파송하였다. 주문모는 반년 후에 밀고로 인해 관에 쫓기는 몸이 되었고, 6년 동안 신도들의 도움으로 피해 다니면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입국 시에 4000명 정도이었던 신자들이 5년 후에는 일만 여명에 이르렀다. 주문모는 지신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순교당하는 모습을 보다가 관가에 자수하여 1801년 음력 4월 19일에 참수형으로 순교 당했다.

1825년 이여진은 역관 조진길과 연서로 교황에게 한국교회의 실정을 알리고 한국교회를 위한 신부를 보내주도록 요청하였다. 1827년 이 편지가 교황 레오 13세에게 전달되었지만, 1830년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 카펠라리가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16세가 1831년 9월 9일부로 베이징 주교구로부터 분리하여 조선에 독립된 교구를 승인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