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구속적 예술에 생명과 샬롬이 움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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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구속적 예술에 생명과 샬롬이 움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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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6.25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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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의 예술을 향하여 - 시어벨트의 개혁주의 미학 (10)
▲ 안용준 목사

이제는 예수님의 구속적 예술을 이야기 할 때도 되었다. 우선 구속적 예술을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가? 시어벨트는 구속적 예술의 전통을 세우기 위하여, 하부구조로서의 성경적 학식을 풍부하게 간직한 믿음의 공동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는 개인적인 문제와 필요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예술의 발전과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큰 비전을 그리는 것이다. 뿌리 깊은 악의 세력 앞에서 크리스천이 홀로 저항하기 힘들다. 또한 구속적 예술을 산출하기 위해 현재의 예술적 토양에 대해 검토해 볼 때 의미 있는 지적이다.

구속적 예술이 지향하는 방향성과 현대 예술이 지향하는 자율성과는 많은 부분 상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낭만주의에 이르러 정점을 이루는 자율성이 지배하는 예술의 흐름은 시각적 인식에 치우친 미와 추라는 코드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흐름이 극단화되면 세계와 삶은 오로지 피상적 현상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이것은 작용하는 실체를 보고 예술을 자율적 현상으로만 파악한 결과이다.

그래서 시어벨트에 의하면 17세기 네덜란드의 렘브란트를 비롯한 화가들이 네덜란드 개혁주의의 생명력 있는 전통으로부터 출현하였듯이, 복음주의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생기 있는 예술적 전통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을 달성하기 위해서 크리스천은 주변의 예술 상황에 수동적으로 반응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러한 목적의 실현을 위한 출발로서, 가장 바람직한 변혁의 능력을 유지하되 보다 깊이 있는 예술성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예술성을 매개로 성도 간에 새로운 차원의 친교를 만들어 가는 것이며, 태양 아래서 마주하는 어떠한 사람과도 열린 대화를 유지해 가는 것 이라고 한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 소외’라는 주제를 가지고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풀어가려는 이상한 몸부림이 만연되어가고 또한 마치 이것이 인간존재의 굉장한 기초인양 떠드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 하지만 이 일은 단연코 성경적 신조에 근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 살아가면서 새로운 예술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과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습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욱이 복음 안에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시켜야 하는 사명과 능력이 담겨있다. 이러한 삶은 시대가 그어놓은 왜곡된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예술적 차원에로 가장 지혜롭게 도약하게 한다. 시어벨트는 이 역사가 오늘날에 더욱 자유롭고 능력 있게 흥왕할 수 있도록 젊은 세대의 탄생을 독려할 것을 제안한다. 지금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감각적, 감성적 문화 예술 환경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 그들에게 자신의 예술세계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누릴 수 있는지를 알려야 한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이 실제 그들의 예술 능력을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언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지금이 적기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을 시온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시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나의 백성은 평화로운 집에서 살며, 안전한 거처, 평온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살 것”이라고 한다(사 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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