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마음으로 나무를 깎고 한옥을 짓는다
상태바
목사의 마음으로 나무를 깎고 한옥을 짓는다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4.06.03 16: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옥 교회를 꿈꾸는 ‘서울한옥’ 대표 황인범 도편수
▲ 자신이 대수선한 한옥을 보며 또 다른 한옥을 구상하고 있는 황인범 도편수.

이런 교회 어떤가. 미음(ㅁ)자 2층 한옥으로 지어진 교회. 가운데 마당에선 목사님이 설교를 한다. 바깥창을 닫고 안쪽창만 열어놓자 네 방향의 교인들은 목사님께 시선 집중. 마당엔 계절 따라 형형색색 피어난 꽃들이 살랑살랑 춤을 춘다. 그 향기가 말씀과 어우러져 바람을 타고 교인들에게 전달된다.

설교가 끝났다. 칸마다 문을 닫으니 8개의 공간이 나타난다. 각종 모임이 끝나는 대로 다시 하나 둘씩 올라가는 바깥창문들. 그러자 아름다운 풍광이 모자이크처럼 맞춰진다. 마침내 안팎의 구분이 사라진 공중누각에서, 교회는 세상과 교감한다.

매주 교회 오는 것이 소풍이고 나들이다. 눈 오고, 비 오는 날이면 자연과 교회와 교인은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그 자체로 힐링. 물론, 이런 저런 단점도 거론되겠지만 한국의 천만 교인 중에 이런 교회당을 원하는 교인도, 또 이런 교회당도, 있고 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귀신 아니라 사람 사는 집
이것은 꿈이다. 황인범 목수의 마음엔 오래 전부터 한옥 교회의 청사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건 일종의 갈증이었다. 지난 97년 순천 선암사에서 목수로 입문한 후 지리산 실상사 약수암, 설악산 백담사 요사채, 가평 현등사 2층 목탑을 비롯, 수많은 문화재 수리 현장에서 목수와 도편수로 일해 왔던 그에겐 늘 아쉬움이 있었다. 이젠 귀신이 사는 집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집을 짓고 싶었고, 절이 아니라 한옥 교회를 세우고 싶었다.

▲ 화방벽을 만들고 있는 현장.
“원래는 목사가 되려고 했거든요. 모태신앙으로 자라 학교 다닐 때도 항상 장래희망은 목사였습니다. 중앙대 독문과를 간 것도 나중에 신학할 때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택한 것이죠. 그런데 군대 갔다 온 후에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당시 학교 동아리 SCM의 선후배들이 모두 목사가 되겠다는 걸 보고, 나는 한발 빼고 싶더라고요. 나까지 목사가 될 필요가 있나 했죠.”

여느 지방 출신 학생들처럼 공무원 시험도 한때 도전해봤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노동이 편했다. 방학 때 아르바이트로 ‘노가다’를 뛰었을 땐 최고 대우를 받았을 정도니까. 가끔 인사동 골목을 다닐 적마다 안식을 느꼈던 걸 보면 그의 혈관 속엔 옛 것에 대한 끌림이 있었던 것 같다.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란 ‘이름표’와 상관없이, 평생 고귀한 노동을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 끝에 얻은 답이 목수였다. 나무를 깎고 만지면 마냥 행복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대기업 시험 볼 때에 전 창덕궁 보수공사 현장을 찾아가서 목수가 되고 싶다고 했죠. 전 당연히 될 줄 알았는데, 떨어졌어요. 나중에 누가 그러더라고요. ‘가방끈’을 숨겨야 했다고요. 저도 ‘먹물’ 출신이지만 사실 ‘먹물’들은 목수 하기 힘듭니다. 먹물의식을 버려야 돼요. 그때 안 되서 많이 낙심했죠. 지방의 절들을 찾아다니다가, 순천 선암사에서 제 첫 스승인 목수 노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부처님에게 절이 안되더라
그것은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그 영감들은 거창한 대의를 가지고 한옥을 짓는 목수가 아니었다. 한옥 짓기는 그들에게 삶 자체였다. 일년에 두 번, 5월, 10월은 집에 가서 논농사를 짓고 와서 또 목수 일을 한다. 삶과 노동이 자연스럽게 일치하는 그 태도, 황 목수는 이것을 배웠다.

두 번째 스승에게선 기술을 전수받았다. 망치와 욕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세상에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들으면서, 몸으로 배웠다. ‘넌 목수 자격이 없으니 집에 가라’는 말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들었다. 황 목수는 그렇게, 혹독하게 도제식으로 배운 마지막 세대다. 그후로는 ‘목수학교’를 통해 목수들이 양산됐다.

처음엔 자질구레한 일부터 시작한다. ‘오막살이’(당시 유행한 담배 오마 샤리프) 심부름을 하다가, 대패질, 톱질을 하고, 간단한 것부터 먹을 긋는 단계에 이른다. 거기에 맞춰서 짜맞춤을 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한다. 어느 덧 지붕 위를 성큼성큼 걷는 내공이 쌓는다.

그렇게 꽤 많은 세월을 보냈던 어느 날, 스승들끼리 하는 말을 들었다. “쟈도 인자 목수라 불러야 안 허것는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분 좋은 말이었다. 2007년, 목수생활 10년 만에 ‘오야지’가 되어 첫 한옥을 지었다. 2009년엔 나무 골조 뿐만 아니라, 창호도 달고 도배도 하고 보일러까지, 그래서 완전한 한옥을 지었다. 그후로 지금까지 많은 한옥들을 신축하고 또 대수선해왔다.

처음엔 황 목수도 문화재들을 주로 다뤘다. 문화재라는 게 사실 거의 절이다. 절에서 일하려면 먼저 스님들에게 큰 절을 해야 한다. 그건 괜찮았다, 어른이니까. 그런데 법당의 부처님 앞에선 도저히 몸이 굽혀지지 않았다. 뿌리 깊은 모태신앙인으로서, 절은 본능적으로 거부됐다. 이런 점 때문인지 목수들 중엔 기독교인이 드물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생활한옥에 천착하게 되었다.

“서원, 향교, 절과 같은 한옥들은 텅빈 집들입니다. 소위 귀신들이 사는 집이죠. 보여주기 위한 집이고요. 그러나 전 사람이 사는 집을 짓고 싶었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은 궁궐처럼 화려한 ‘다포집’을 짓기 힘든 집으로 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짓기 쉽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이 어렵습니다. 지을 때마다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하고요, 주인과 갈등을 조정하면서 또 해야 하니까요. 그런만큼 더 보람과 가치가 있죠.”

▲ 한옥을 지어 사는 서울대 로버트 파우저 교수와 함께.
한옥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
최근 그는 매스컴을 좀 탔다. 몇 년 전에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로버트 파우저 교수의 종로 체부동 한옥을 대수선해주고 그것을 책으로 썼다. ‘작은 한옥 한 채를 짓다’(돌베개)란 책은 한옥을 지어 살고 싶은 이들이 솔깃할 정보들이 쏠쏠하게 들어가 있다. 이전까지의 추상적인 한옥 관련 책과는 차원을 달리해 많은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한옥에 대한 편견이 있죠. 비싸다, 또 불편하다. 그런데 왜 비싼지 이해해야 합니다. 다 장인과 노동자들이 한땀 한땀 만든 작품입니다. 문화적 가치가 있는 집이죠. 추운 건, 단독주택은 아무래도 아파트보다 춥죠. 그러나 요즘은 많이 개량되어 괜찮습니다. 오히려 여름엔 훨씬 시원하죠. 에어컨도 거의 필요 없어요.”

한옥은 수납공간이 부족하다는 불만도 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자. 한옥에 살면서 단순한 라이프스타일을 체득하게 된다. 집의 형태가 더 나은 삶과 가치관으로 이끄는 것이다. 최근 한옥에 살게 된 어떤 어머니는 황 목수에게 ‘간증문’을 보내왔다. 아이들과 밤에 마루에 나란히 앉아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사시사철 마당에서 평상을 놓고 누리는 자연의 혜택만으로도 한옥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

평생 아들이 목사가 되길 바라셨던 부모님(두분 다 예장 통합 순천 별량개령교회 은퇴 장로)는 최근 그 기도 제목을 내려놓았다. 얼마 전에 둘째 형이 목사가 된 덕분이다. 그러나 황 목수는 여전히 ‘목사’의 마음으로 나무를 대패질한다. 그 시간은 그에게 무념무상, 경건의 몰아에 빠진 구도자의 시간이다.

“요즘 많은 이들이 힐링을 말하며 조용한 곳을 찾아다니는 걸 봅니다. 그런데 그런 곳이 거의 절이거든요. 기독교인은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한옥 교회 또는 한옥 수양관을 예쁘게 지어 교인들도 그런 곳에서 ‘처치 스테이’를 하며 힐링을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언젠간 그런 한옥 교회를 꼭 근사하게 지을 겁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